2025년 09월 14일
9-13-2200

선이슬람 시대, 특히 남부 아라비아는 복잡한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역동성을 지닌 시기로 평가됩니다. 이 가운데 마립 댐(Marib Dam)은 사바 문명의 상징이자 이 지역 문명적 성취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댐의 붕괴는 이주를 촉발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되며, 당시 사회의 불안정성과 변화 가능성을 잘 보여줍니다.

사바 문명은 남부 아라비아의 대표적 문명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정착민 사회(hadari)의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바인과 이웃들은 수많은 비문을 남기며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초기 사바어 비문에는 비를 내려준 아흐타르(Athtar) 신에게 감사를 표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물 관리와 신앙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마립 댐은 사바 문명의 가장 위대한 관개 시설로, 기원전 6세기에 최종 형태와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꾸란(Qur’an)에 언급된 사바의 “두 정원(two gardens)”은 댐이 가져다준 풍요를 상징하며, 약 9,600헥타르의 넓은 농경지를 관개했습니다. 이는 빗물을 활용하려는 필요성이 정착 사회의 건설을 촉진하고, 다시 농업 발전을 가속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마립 댐은 사바 사회의 정치적·종교적 통일의 중심이었습니다. 사바의 주신인 일마카(Ilmaqah)는 사바 민족(shaʿb)의 정체성과 단결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연맹에 새로 가입한 부족들은 마립으로 순례하여 일마카 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 신의 ‘양자’가 되는 의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러한 신권적 통합은 수세기 동안 남부 아라비아에 정치적 연대의 틀을 제공하였고, 나아가 이슬람의 통일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꾸란에 등장하는 “알라의 끈(habl Allah)”이라는 개념은 사바어의 “하블(hbl)”과 같은 어원을 가지며, 이는 사바 문명의 정신적 유산이 이슬람적 언어와 개념 속에 잔존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마립 댐은 결국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기원후 6세기의 사바어 비문에는 에티오피아 악숨(Axum) 기독교 세력이 점령한 남부에서 병든 댐을 수리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댐은 끝내 회복 불가능하게 붕괴하였고, 기원후 7세기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무너졌습니다. 꾸란은 이를 사바 사람들이 신의 은혜에서 등을 돌린 결과라고 해석하며, 풍요로운 두 정원이 쓴 과일과 타마리스크, 몇 그루의 뽕나무만 남은 황폐한 정원으로 바뀌었다고 묘사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댐은 쥐가 갉아먹으면서 붕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마립 댐의 붕괴는 사바 문명의 쇠락을 알리는 사건이자, 대규모 이주(diaspora)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선이슬람 시대 댐 붕괴(pre-Islamic damburst)”로 불리며, 카힌 타리파(Kahin Tarifah)가 마립에서 사람들의 전설적인 이주를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사건은 아라비아반도 전역의 인구 분포와 문화적 지형을 재편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더 큰 선이슬람 시대의 맥락 속에서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정착민과 유목민 사회의 이중성입니다. 마립 댐은 정착 사회의 번영을 상징했으나, 그 붕괴는 정착 생활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많은 이들을 새로운 정착지나 유목 생활로 내몰았습니다. 둘째, 아랍 정체성의 형성입니다. 이주는 다양한 부족과 민족의 혼합을 낳았고, 이는 초기 아랍 정체성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습니다. 셋째, 통일 사상의 진화입니다. 사바 문명이 보여준 신을 통한 정치적 통합 경험은 훗날 이슬람 국가의 통일 모델에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립 댐의 붕괴는 단순히 한 문명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슬람 시대 아랍 사회의 인구 이동, 문화적 교류, 그리고 이슬람 도래의 토대를 형성하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이는 남부 아라비아적 특성이 점차 줄어들고, 점점 더 ‘아랍적(more Arab, less South Arabian)’인 정체성으로 변화해 가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