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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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의 재산이 아니라, ‘미래의 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세대

영국의 한 사회조사에 따르면, 향후 30년 동안 수조 파운드의 재산이 세대를 거쳐 상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위대한 부의 이동(Great Wealth Transfer)’이라 불리는 이 흐름은 한국 사회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막대한 자산의 이동이 ‘사랑과 신뢰’로 이뤄지기보다, 조급함과 불안, 그리고 돈의 힘으로 인해 왜곡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가 상승과 부동산 가격 폭등은 젊은 세대에게 상속을 ‘희망’이자 ‘필수’로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에서는 2000년 평균 주택 가격이 8만4천 파운드(약 1억4천7백만 원)였던 것이, 지금은 29만3천 파운드(약 5억1천2백만 원)로 세 배 넘게 뛰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청년의 57%가 “가족의 도움 없이 집을 살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한국 역시 ‘영끌’ 세대와 ‘부모 찬스’가 일상이 되었지요.

이제 상속은 단순한 노후 자산이 아니라, 젊은 세대의 생존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아직 살아 있는 부모의 재산’을 이미 자신의 것처럼 여기게 되는 심리적 변화입니다. “언젠가 내 것이 될 돈인데, 지금 미리 쓰면 안 될까?”라는 유혹이 가족 관계를 뒤틀어 놓습니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재정적 학대’

영국의 노인 보호 단체 ‘아워글래스(Hourglass)’는 매년 7만5천 건 이상의 노인 학대 사례를 지원한다고 합니다. 이 중 80% 이상이 가족 구성원에 의한 경제적 착취입니다.

가장 흔한 형태는 “부모님, 손주 등록금 좀 도와주세요”, “지금만 빌려주세요”와 같은 정서적 압박입니다. 처음엔 도움을 요청하는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요구로, 그리고 협박으로 변합니다.

어떤 자녀는 “돈을 안 주면 손주를 보여주지 않겠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부모가 더 싼 요양원으로 옮기도록 강요합니다. 이른바 ‘유산 보존(inheritance preservation)’이라는 이름으로, 노인의 소비를 제한하고 지출을 통제하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가족의 재정 관리를 돕는 것 같지만, 사실상 노인의 경제적 자유를 빼앗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학대는 법적 범죄이지만, 피해자는 대부분 스스로 피해자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가해자가 “사랑하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를 돌봐주는 사람”이라는 믿음

노인들이 자녀의 행동을 학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저 아이는 내 가족이야. 나를 해치지 않아.”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상담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를 돌봐주는 가족이니까’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합니다. 사랑과 신뢰가 돈의 문제로 얽히면, 관계는 순식간에 권력 관계로 변합니다. 돈을 가진 사람은 의존의 대상으로, 돈이 필요한 사람은 설득과 압박의 주체로 바뀝니다. 그렇게 가족 간의 ‘심리적 서열’이 형성됩니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는 늘고 있습니다. 부모의 퇴직금이나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자녀, 고령 부모의 명의로 사업 자금을 빌려 쓰는 경우 등은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부모는 “내가 죽으면 어차피 그 돈은 자식에게 갈 텐데…”라며 마음을 누그러뜨리지만, 그 순간 이미 학대의 문은 열려버립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경계’

전문가들은 상속과 관련된 가족 갈등을 예방하려면 ‘관계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노년기에 접어든 부모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의사결정권자’로서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내 재산은 나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하지요.

또한 자녀와의 대화에서는 “돈을 주는 이유”와 “주는 시점”, “관리 방식”을 명확히 문서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영국처럼 ‘지속적 위임장(Lasting Power of Attorney)’ 제도를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재정권을 맡기는 방법도 참고할 만합니다.

무엇보다, 상속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돕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지만, 그 사랑이 조건과 기대를 낳는다면 관계는 금세 변질됩니다.

노년의 돈, 노년의 자존감

돈은 오랜 세월의 노동이 남긴 흔적이자, 인생의 자존감입니다. 그 돈을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나눌지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노후 재산은 단순히 가족에게 물려줄 ‘유산’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지탱하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내가 도와주면 저 아이가 행복할 거야.”라는 믿음은 따뜻하지만, 때로는 위험합니다. 자녀의 삶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한국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부의 이전’을 건강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상속을 둘러싼 도덕적 기준과 사회적 대화가 성숙해야 합니다. 사랑을 앞세운 재정적 착취를 막기 위해서는, ‘사랑’만큼이나 ‘경계’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