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 시대 초기의 정복 물결을 제도화하고, 영적 공동체였던 움마(ummah)를 세속적 제국으로 전환시킨 결정적인 왕조였습니다. 이들은 정복의 성과를 제국 체제로 정착시킴과 동시에 아랍어를 행정과 문화의 중심에 두어 장기적인 아랍 세계의 정체성을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통치는 세속화와 권력 다툼으로 점철되어, 훗날 압바스 혁명으로 이어질 쇠퇴의 단초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1. 등장과 정통성 논란
우마이야 왕조는 내부 분열의 상황에서 등장하였습니다. 창건자인 무아위야(Mu‘awiyah)는 제3대 칼리프 우스만의 암살 이후 알리와의 내전에서 승리하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661년, 무아위야는 통합의 해(Year of Unity)를 선언하고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하여 칼리프직을 사실상 왕권으로 변모시켰고, 이는 꾸라이쉬 부족 내에서 격렬한 정통성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논쟁은 해시미(Hashem)와 우마이야(Umayyah)라는 고대 부족 경쟁의 연속선상에 있었습니다.
2. 제국의 세속화와 물질주의
우마이야 왕조는 금욕적 이상에서 벗어나 제국적 관행을 받아들였습니다. 칼리프들은 사치스러운 궁전을 짓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정복은 종종 세속적 보상과 연결되었습니다. 무아위야의 측근들은 다마스쿠스 알-구타의 무화과와 올리브를 위해 싸우겠다고 말하였고, 이집트는 ‘젖소’로 불릴 만큼 자원의 공급처로 인식되었습니다. 수도를 메디나에서 다마스쿠스로 옮긴 것도 종교적 중심에서 세속적 권력 중심으로의 전환을 상징합니다.
3. 아랍화 정책과 문화적 혁신
압드 알-말릭 칼리프(685–705)는 제국의 통치 체제를 아랍어로 일원화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행정 문서와 화폐가 모두 아랍어로 전환되었고, 이는 꾸란의 언어를 제국의 언어로 정착시킨 결정적 조치였습니다. 그는 비잔틴식 주화를 대신해 경건한 문구가 새겨진 아랍어 화폐를 발행했으며, 이를 통해 이미지가 아닌 언어를 제국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아랍화 정책은 고위 꾸란 아랍어가 성직자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언어로 살아남게 했습니다.
4. 내분과 쇠퇴의 씨앗
우마이야 왕조는 문화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균열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알리의 후손을 지지하는 시아파는 카르발라 전투(680년)에서 알-후사인의 순교라는 상징적 사건을 겪으며 왕조에 저항하였습니다. 또한 우마이야 왕조는 부족 간 경쟁을 이용하여 통치했으나, 이는 장기적으로 쿠라산 지역의 불안정과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강압적 총독 알-핫자즈 이븐 유수프의 폭압적 통치는 공포와 반발을 동시에 낳았으며, 왕조의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결론
우마이야 왕조는 정복의 성과를 제도화하고 아랍어를 제국의 중심 언어로 세움으로써 아랍 세계의 지리적·언어적 경계를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통치는 세속화와 내분으로 흔들렸고, 이러한 모순은 결국 750년 압바스 혁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영광과 쇠퇴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 이슬람 시대 초기의 전환적 왕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