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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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와 영혼에 얼마나 해로운지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이 계획은 스마트폰 사용을 의무화한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예언자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아니라, 앨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였습니다.

헉슬리의 1932년 출간된《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년 출간》에서 시민들은 중독성 있는 오락 기술에 길들여져 진정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적어도 민주적인 서구 사회에서는, 21세기의 어두운 그림자를 더욱 닮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1949년에 출간된 소설 《1984》 속, 극심한 감시와 통제 아래 놓인 ‘에어스트립 원(Airstrip One)’의 전체주의적 질서보다 오히려 더 정확한 현실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1984》는 여전히 더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영향으로 ‘오웰식(Orwellian)’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공적 담론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남용되는 형용사로 남아 있습니다.

헉슬리를 정당하게 평가하자면, 정부가 개인 오락 기기를 의무적으로 보급한다는 발상은 ‘오웰식’이라기보다 ‘헉슬리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조지 오웰이 그린 디스토피아가 공포와 억압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디스토피아는 욕망과 말초적 자극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디스토피아(Dystopia), 카코토피아(Kakotopia), 안티유토피아(Antiutopia)는 모두 이상향인 유토피아(Utopia)와 대조되는 ‘부정적 형태의 가상 세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오웰이 책을 금지할 자들을 두려워했다면, 헉슬리는 아무도 책을 읽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질 것을 두려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웰은 책을 읽지 못하는 세계를 경고했고, 헉슬리는 책을 읽지 않는 세계를 경고한 것입니다. 저항시인 김수영도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책을 읽을 필요를 없게 만드는 《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가 더 무섭다.”라고 평했습니다.

“요즘 누가 책을 읽습니까?”

이 말에 동의 하신다면 《멋진 신세계》를 쓴 헉슬리의 경고가 100% 맞아 떨어집니다.

저는 정부의 전자 정부 맨 끝은 디지털 신분증을 통해서 스마트폰 소유를 사실상 의무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분증 카드는 투표권 행사에 필수적이 될 것이며, 모든 자산은 스마트폰에 들어 있는 가상 ‘지갑’ 형태로 저장될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바로 이 순간, 중독성 있는 디지털 기기가 아동에게 미치는 해악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어른들에게 의무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전히 반(反)스마트폰 입장을 ‘시대착오적’이라 비웃는 분들은, 스마트폰의 끊임없는 데이터 축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스마트폰의 집요한 알림, 주의 분산, 뇌에 무의미한 자극을 주는 콘텐츠 피드는 인간 성장과 지성의 주요 위기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감시카메라 보다 더 집요하게 여러분을 추적하고 관찰하고 있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2000년대 중반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이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점수(읽기와 수학 능력)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OECD 보고서는 성인 기술 수준 저하와 수리 능력 저하가 같은 기간 대부분 선진국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지적합니다. IQ 점수도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사회적 고립과 정신 건강 위기에 스마트폰이 원인이 되고 있음은 이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조사에서는 10대 중 40%가 ‘지속적인 슬픔이나 절망감’을 경험한다고 했고, 30%는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면역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텍사스대학 연구진은 스마트폰 인터넷 차단이 사용자 정신 건강을 크게 개선했으며, 그 효과가 항우울제 복용과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정부는 결코 휴대폰을 금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 중독성 있는 재앙적 상황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어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권리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휴대폰은 ‘중립적 기술’ 혹은 ‘도구’로만 치부되지만, 실제로는 소수만이 분명한 장점을 크게 체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을 스마트폰에 종속되도록 설계된 이 시스템의 ‘이점’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크린 중독은 거대 기술기업이 쌓은 비즈니스 모델의 기반입니다. 온라인에서 더 오래 머물수록,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광고로 유도합니다. 세계 최대 부호들의 재산은 여러분을 화면에 붙잡아두는 데서 비롯되며, 그 대가는 삶의 나머지 영역을 잃는 것입니다.

구글 전직 디자인 윤리학자 트리스탄 해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화면 저편에는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사용자를 붙잡아두도록 고용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련된 알림 기술, 무한 스크롤, 짧은 동영상, 끝없이 알고리즘으로 이어지는 콘텐츠가 여러분을 중독시킵니다. 알림은 정기적이지 않고 불규칙하게 도착하여 뇌의 보상 체계를 강화하고 강박적 확인 습관을 만듭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작은’ 자극들이 인간의 의지력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말합니다.

영국 성인은 평균 하루 7시간을 화면 응시에 소비합니다. 이 수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층은 휴대폰을 멀리하고 싶으면서도 끊임없이 끌려갑니다.

오늘날 학생들은 인생의 25%를 휴대폰에 소비할 것이라는 추정치도 있습니다. 스마트폰 사용을 자제하려는 의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문자발송 같은 평범해 보이는 기능 조차 스마트하게 습관 형성을 겨냥하여 설계됩니다. 사용 시간을 줄이는 기능마저 의도적으로 미흡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물론 디지털 신분증이 실제로 의무 시행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디지털 여권이나 디지털 운전면허 등은 분명한 흐름입니다. 특히 은행 같은 기업들은 고객을 앱으로 끌어들이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줄을 서지 않는 현명한 방법이라며 앱을 깔도록 유도합니다. 이제 친구가 사무실 출입을 위해서라도 스마트폰을 꺼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직장이나 가정 책임 때문에 휴대폰을 쉽게 끊지 못합니다. 일부는 아예 스크린 중독에 면역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항 운동은 생겨나고 있습니다. 좋은 대안 기기들도 늘어나고 있지만, 심지어 ‘2G폰’조차 위치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게 오는 이메일에서도 휴대폰 중독 탈출기를 공유하는 독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격의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스크린에서벗어나 ‘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초가공식품인 소시지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생고기’를 찾게 되듯, 이제는 가공된 유튜브 영상이나 넘겨듣는 정보가 아니라, 살아있는 1차 지식의 원천인 ‘책’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헉슬리가 경고했던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