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9월 17일
9-16-2200

선이슬람 시대는 유목민 사회(badawi)와 정착민 사회(hadari)의 이중성, 그리고 부족 간의 분쟁과 통일 시도가 아랍 사회의 주요 특징으로 나타났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메카는 순례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메카는 “콰리야(qariyah)”, 즉 유목민 지역에 형성된 정착지의 가장 중요한 후기 사례로, “콰리야트의 어머니(the Mother of Qariyahs)”라 불렸습니다. 이는 킨다 부족의 중심지였던 콰리야트 닷 카흘(Qaryat Dhat Kahl)과 같은 초기 정착지들의 발전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메카는 유목 생활과 정착 생활의 융합을 상징하며, 아라비아반도에서 상업과 종교를 기반으로 번영한 도시 문명의 정점을 나타냈습니다.

카바(Ka’bah)는 메카의 종교적 중심지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당시 카바는 다신교적 성격을 띠며 수많은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었습니다. 608년 홍수로 파괴된 후 재건될 당시, 쿠라이시(Quraysh) 부족은 ‘검은 돌(Black Stone)’을 놓는 문제로 다투었고, 결국 무함마드가 중재하여 갈등을 해결하였습니다. 검은 돌은 고대 남아라비아 비문에서 “신과 함께 안전을 얻는다”는 의미와 관련되었고, 가공되지 않은 돌을 신의 상징으로 삼는 관습은 유대교 전통과도 유사했습니다. 카바는 “지구의 배꼽”이라 불렸으며,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확장되는 자궁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카바 안팎에는 시리아에서 도입된 후발(Hubal), 알라트(al-Lat), 마나트(Manat), 알-우자(al-Uzza) 등 아라비아 여신들, 그리고 간통하다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의 이사프(Isaf)와 나일라(Na’ilah)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또한 쿠라이시 부족 조상들의 초상화와 함께 예수와 마리아의 이미지도 존재했는데, 무함마드는 훗날 이 이미지를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마립(Marib)과 같은 남아라비아의 전통과 유사한 순례 의식(hajj)이 행해졌으며, 이는 종교적 신앙과 부족적 정체성을 결합하는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상업적으로도 메카는 번영을 누렸습니다. 강력한 쿠라이시 부족은 이 도시를 지배하며, 이름 그대로 “사람들을 모으다” 또는 “돈을 벌다”는 의미에 걸맞게 상업 활동을 주도했습니다. 메카는 히자즈(Hijaz)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아 비잔틴과 페르시아 간의 대립으로 생긴 무역 공백을 메우며, 아라비아 전역의 무역 네트워크를 확립했습니다. 쿠라이시는 겨울과 여름에 걸친 장거리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고, mudarabah(이익 공유 파트너십)와 같은 혁신적인 상업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카바의 종교적 권위는 메카를 “신성한 하이퍼마켓”으로 만들어 상업적 번영을 더욱 촉진하였고, 이로써 쿠라이시는 부유하고 안정된 공동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번영은 동시에 무함마드가 전한 새로운 사상에 대한 강한 저항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메카의 모습은 더 큰 선이슬람 시대의 맥락 속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메카의 종교적 통합 모델은 남아라비아 사바(Saba) 문명이 공유된 신을 중심으로 정치적 통일을 이룬 방식과 유사했습니다. 꾸란에 등장하는 “알라의 끈(habl Allah)”은 사바어의 “하블(hbl)”과 동일한 개념으로, 이는 메카가 남아라비아 문명으로부터 통일 사상에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메카의 다신교적 환경은 곧 모나테즘 사상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선포한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선언은 메카 사회의 종교적 권위뿐 아니라 경제적 기반에도 도전이 되었고, 당시 기득권층은 그의 계시가 가정과 공동체를 분열시킬 것이라며 경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선이슬람 시대 메카는 종교적 순례와 상업적 번영이 긴밀하게 결합된 도시였습니다. 카바를 중심으로 한 다신교적 숭배는 무역을 활성화시켰고, 쿠라이시 부족의 상업적 능력은 메카를 아라비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번영은 무함마드가 전한 일신 사상과 충돌하며, 이슬람 혁명의 서막을 여는 배경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