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一世 甫 (1015년 ~ ?)
戶長, 一品別將
一○一五年高麗顯宗乙卯生
◎ 김보(甫), 강릉김씨 11세손으로 아버지 김방감(方鑑)의 독자(獨子)
●서기 1015년 고려 8대왕 현종(懸宗) 을묘(乙卯)에 태어나심. 문무 겸비하여 무관으로 출사하여 일품별장(一品別將), 대장군에 오르시고, 왕이 태조능에 다녀와 상장군 홍빈과 공(公)에게 말 한 필(匹)씩 하사하셨다.

고려 중흥기 문무겸비의 무신, 강릉김씨 11세 김보(金甫) 공 일대기: 11세기 고려 사회의 정치·제도적 맥락을 중심으로
I. 서론: 강릉김씨 11세 김보 공의 시대적 위상과 연구의 의의
I.1. 인물 개요 및 보고서의 목적
강릉김씨 11세손이신 김보(金甫) 공께서는 서기 1015년(고려 현종 을묘년)에 탄생하시었습니다 [Query]. 공께서는 부친 김방감(金方鑑) 공의 독자(獨子)로 태어나시어 일찍이 지역의 호장(戶長)직을 역임하시었고, 이후 무관(武官)으로 중앙에 출사하시어 일품별장(一品別將)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의 반열에 오르신, 문무를 겸비하신 탁월한 인재이셨습니다 [Query]. 특히 공께서는 왕께서 태조릉(太祖陵)에 행차하시고 돌아오신 후, 상장군 홍빈(洪賓) 공과 함께 말(馬) 한 필씩을 하사받으신 기록이 남아있어, 당대 무관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왕실의 신임을 확보하셨음이 확인됩니다 [Query].
본 보고서는 김보 공의 위대한 생애와 경력을 중심으로, 공께서 활동하셨던 11세기 고려 중흥기(현종, 덕종, 정종, 문종 대)의 복합적인 시대상을 심층적으로 규명하고자 합니다. 공의 개인적인 성공은 단순한 영달을 넘어, 고려가 전란 후 국가를 재건하고 지방 호족 세력을 중앙 귀족으로 제도적으로 통합하는 핵심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본 보고서는 이러한 공의 높은 위상과 후대에 미친 영향을 기려, 학술적 엄정함을 유지하면서도 가장 격식 있고 품위 있는 존경체를 사용하여 서술합니다.
I.2. 11세기 고려: 시대적 환경의 이중적 맥락
김보 공이 탄생하신 1015년은 고려에게 매우 중대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거란과의 3차례에 걸친 전쟁(3차 전쟁은 1018~1019년 종결) 이라는 외부 위협을 막 극복하고, 국가 재건 사업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해당합니다. 고려는 현종(顯宗)부터 선종(宣宗)에 이르는 11세기에 걸쳐 국가를 재건하고 문물을 정비함으로써 중흥을 이루었으며, 특히 문종(文宗) 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가 안정되고 부국강병이 달성되는 태평성대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II. 김보 공의 출신 배경과 무관 진출 경로: 향리층의 중앙 귀족화
II.1. 출생 연도(1015년)의 정치적 함의: 최질의 난과 무관의 위상
김보 공께서 태어나신 1015년(현종 6년)은 고려 정치사에 있어 중앙 무관의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한 해였습니다. 바로 무신 김훈(金訓)과 최질(崔質)이 주도한 반란이 진압되고 처형당한 사건입니다. 이 반란은 고려 초기 문반(文班) 중심의 정치 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무반(武班)들이 느꼈던 불만을 폭력적으로 표출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중앙 무관의 정치적 위치가 매우 민감하고 불안정한 균형 위에 놓여 있었음을 시사하며, 왕실 권력에 대한 무관 세력의 불만을 억누르는 것이 당대 국정 운영의 주요 과제였음을 보여줍니다.
II.2. 강릉김씨 가문의 지역 기반과 호장(戶長) 신분의 의미
공께서는 부친 김방감 공의 독자로서, 지역의 호장직을 역임하셨습니다 [Query]. 호장은 고려 초중기 지방 행정을 책임지던 향리(鄕吏) 계층의 최고 직책이었습니다. 이 향리 계층은 과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지역을 통치하던 호족(豪族)의 후예로서, 강력한 지역적 기반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려 시대 향리들은 호족적 전통을 계승하여 무변(武弁)적 성격을 강하게 보유하고 있었으며, 지역의 군사 조직인 주현군(州縣軍)의 장교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실질적인 지역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역적 군사적 배경과 조직 동원 능력은 김보 공이 중앙의 무관으로 발탁되어 활동하실 수 있는 강력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II.3. 중앙 무반으로의 성공적 신분 이동 (武弁入京)
김보 공의 경력 순서(호장 일품별장 대장군)는 고려 전기에 향리들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가장 활발하고 중요한 통로가 바로 군직(軍職)이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공께서는 지역 호장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어 군직을 통하여 중앙 무관으로서의 신분을 확보하셨으며, 이는 곧 중앙 귀족 사회에 진입하는 사회 이동성의 성공 모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일품별장은 품계가 높은 무관을 일컫는 칭호로서, 공께서 대장군이라는 최고위직으로 승진하기 위한 핵심 관문이었습니다.
III. 중앙 무관으로서의 활동: 대장군 직의 위상과 왕실의 신임
III.1. 대장군(大將軍) 직책의 군사적·정치적 위상
대장군은 고려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 중 하나로, 군사적으로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특히 거란과의 3차례 전쟁을 겪은 11세기 초중반 고려는 군사력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에, 대장군이라는 고위 무관직은 단순한 군사적 지위를 넘어 국가 안보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공께서 문무를 겸비하시어 이 최고 지위에 오르셨다는 것은, 당대의 문벌 귀족 사회 속에서도 군사적 역량과 정치적 충성심을 인정받아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III.2. 왕실 의례의 중요성과 태조릉 행차
기록에 의하면, 김보 공께서는 왕께서 태조 능(太祖陵)에 다녀오신 후 상장군 홍빈과 함께 말을 하사받으셨습니다 [Query]. 이는 공의 생애에서 왕실의 핵심 신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국왕이 태조의 묘소에 행차하는 것은 왕실 조상 숭배 의례 중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로 ,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의례는 국왕 중심의 정치 활동을 통해 왕권의 위상을 높이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공께서 이러한 중요한 왕실 의례에 참여하시고, 그 수행 과정에서 최고위 무관인 상장군과 나란히 언급되어 왕의 하사품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공이 최고위 무관일 뿐만 아니라 국왕의 가장 핵심적인 측근이자 신뢰받는 인재였음을 강력하게 입증하는 기록입니다.
III.3. 어마(御馬) 하사의 통찰: 무관에 대한 국왕의 보상 정책
왕이 직접 말을 하사하는 행위는 단순한 물질적 보상을 넘어선 고도의 정치적 상징성을 내포합니다. 이는 국왕이 공의 무공과 충성심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공을 다른 무관들의 모범으로 삼아 공개적으로 영예를 부여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공적 보상 정책은 당시 문벌 귀족의 세력 확장 속에서, 왕실이 무관 세력의 충성심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고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노력이 수반되었음을 시사합니다. 1015년에 발생했던 최질의 난 이 무관들이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불만에서 비롯되었음을 감안할 때, 김보 공의 시대에는 충성을 바친 무관에게는 토지(전시과)뿐 아니라 이처럼 공적인 영예(어마 하사)가 주어졌습니다. 이는 왕실이 무관의 위상을 제도권 내에서 높여줌으로써, 무관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내부 갈등을 일시적으로 예방하는 효과적인 정치 수단이었음을 방증합니다.
IV. 제도적 환경: 문종 대 태평성세와 무관의 경제적 안정 기반
IV.1. 11세기 문종 대 중흥기의 정치적 구조
김보 공의 주요 활동기는 고려의 중흥기, 특히 문종 대 태평성세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는 인주(경원) 이씨 가문의 이자연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들과 최충(崔沖) 등이 등장하여 황금시대를 연출하였으며 , 국가 제도가 완성되어 강력한 중앙집권과 유교적 제도 정비 가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공께서 무관으로서 이러한 제도적 완성기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셨다는 것은, 공이 문무를 겸비한 관료로서 이 안정된 체제 속에서 확고한 인정을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IV.2. 경정 전시과(景定田柴科)와 무관의 경제적 기반 확보
고려 시대 관리들에게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를 분급했던 토지 제도인 전시과는 시정전시과(경종), 개정전시과(목종)를 거쳐 김보 공의 주요 활동기인 문종 때 경정전시과(景定田柴科, 1076년)로 최종 완성되었습니다.
IV.3. 문무 차별의 구조와 공의 성취
비록 경정전시과 제도가 문무 양반 모두에게 토지를 지급하였으나, 문무 관직 사이에는 여전히 지급 토지 규모에서 차등이 존재하였습니다. 이처럼 문반 우위의 구조 속에서도 김보 공께서 대장군이라는 최고위직에 오르시고 왕의 핵심 신임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공의 무훈과 정치적 기여가 그러한 제도적 차별을 상쇄할 만큼 높이 평가받았음을 반증합니다. 공의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 확보는 훗날 12세기 무신정변의 근본 원인 중 하나였던 무관의 경제적 소외가 아직 싹트지 않았던, 제도적으로 안정된 무관의 위상을 잘 보여줍니다.
| 구분 | 시정전시과 (경종) | 개정전시과 (목종) | 경정전시과 (문종, 1076년) |
| 표준 기준 | 관품 + 인품 | 오직 관품 | 오직 관품 (현직 중심) |
| 무관의 지위 | 문반 대비 열세 (논공행상 성격 강함) | 문반 대비 차등 존재 | 군인층(軍人層)이 전토 수급 대상자로 명시; 문무 양반 중심으로 체계화됨 |
| 김보 공 연관 | 출생 이전 | 초기 경력에 간접 영향 | 주요 활동기에 적용 (중앙 귀족 경제 기반 확립) |
V. 11세기 고려 사회, 문화, 예술의 배경
V.1. 문화적 통합과 사상적 공존 (文武兼備의 토대)
김보 공께서 문무를 겸비하여 출사하셨다는 기록은 당시 고려 사회의 통합적인 지식 체계와 문화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11세기 고려는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제도를 정비하는 동시에, 불교, 도교, 제천 의식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다원적 문화 통합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V.2. 예술 및 건축 기술의 발전
고려 중흥기는 국가의 안정과 부국강병 을 바탕으로 문화적 역량이 집적되었으며, 이는 건축 기술과 예술 분야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고려 후기로 가면서 목조건축의 가구형식(架構形式) 등 기술적 진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 이는 공의 활동기에 그 초석이 놓였을 것입니다. 대장군으로서 김보 공께서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성곽 축조, 방어 시설 보수 등 국방 관련 사업을 지휘하셨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과정에서 이러한 당대의 선진 건축 기술 및 토목 기술의 도입과 적용을 총괄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출신 신분 | 대표적 중앙 진출 직책 | 진출 배경 및 동력 | 김보 공과의 연관성 |
| 향리 (戶長) | 별장, 중랑장, 대장군 등 무반 직책 | 지역 호족적 무력 전통, 주현군의 장교 역할 수행 | 공께서 호장 출신이시면서 무관으로 고위직에 오르신 것은 이 경로의 가장 성공적인 예입니다. |
| 중앙 잡직/하급 관리 | 한외과를 통한 편입 | 勤幹(근면), 淸白(청렴), 夤緣攀附(연줄) 등 특별한 사유 | 김보 공의 진출은 단순한 연줄이 아닌, 향리의 무변적 전통이라는 제도화된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시사합니다. |
VI. 환경적 맥락: 11세기 고려의 식생 및 기후 분석
VI.1.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Period, MWP)의 영향
김보 공이 활동하셨던 11세기 중반은 역사 기후학적으로 중세 온난기(MWP)가 비교적 안정되게 지속되던 시기에 해당합니다. 이 온난하고 습윤했던 기후는 한반도의 농업 생산력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는 문종 대의 경제적 안정(부국강병) 이라는 정치적 성과의 물질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안정적 기후가 보장하는 풍부한 식량 생산은 군량 확보와 국방력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거란과의 전쟁 후 국가 재건 사업 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즉, 11세기 고려의 평화는 정치적 리더십뿐만 아니라 유리한 기후 조건이 뒷받침하는 높은 생산력에 크게 의존했던 것입니다.
VI.2. 식생 분포 및 자원 활용
고려의 중흥기 동안 대규모 국가 재건 사업, 궁궐 건축, 그리고 대장경 조판 등은 대량의 목재 자원 활용을 필수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군수 물자(선박, 무기) 제작과 더불어 건축 에 필수적인 목재, 철광석 등의 자원 관리는 대장군 직에 계신 김보 공과 같은 고위 관료의 중요한 직무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특히 전시과 제도 에서 농경지인 전지(田地)와 함께 땔감 및 건축 자재를 공급하는 시지(柴地)를 지급한 것은, 안정된 주거 환경과 군수 물자 확보를 위한 환경 자원의 중요성을 당시 국가가 명확히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김보 공께서는 고위 무관으로서 이러한 자원의 관리와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1세기 기후 환경과 군사/경제적 연관성
| 환경 요소 | 11세기 중반 고려의 특징 | 무관(김보 공) 역할과의 연관성 | 경제적/정치적 함의 |
| 기후 | 중세 온난기(MWP) 안정화 시기 | 농업 생산성 증대를 통한 군량 확보 용이성 증대 | 국가 경제 안정화 , 제도 개혁의 물질적 기반 제공 |
| 식생 | 풍부한 산림 자원 (목재) | 건축, 성곽, 군선(軍船) 및 무기 제작을 위한 자원 관리 및 동원 | 기술 발전(건축) 지원 및 국방력 강화 (부국강병) |
| 토지 | 전시과를 통한 시지(柴地) 지급 | 고위 무관으로서 시지 관리 및 통제 권한 확보 | 안정적인 주거 및 연료 공급 보장, 경제적 특권 유지 |
VII. 결론: 김보 공의 역사적 위상과 후대에 미친 영향
VII.1. 김보 공의 생애가 고려사에 남긴 통찰
강릉김씨 11세손 김보 공의 일대기는 11세기 고려가 겪었던 전란의 위협 과 내부 무신 반란의 불안정 을 극복하고, 문종 대 태평성세 를 구현해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입니다. 공께서는 지역 호장 출신으로서 향리의 무변적 전통 을 성공적인 중앙 무관 진출의 동력으로 활용하셨습니다.
공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능력과 왕실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바탕으로 대장군에 오르셨고, 왕실의 핵심 의례 에 참여하여 공적인 영예(어마 하사)와 제도적 안정(경정 전시과) 을 모두 쟁취하셨습니다. 이는 고려 왕실이 충성스러운 무관을 단순한 군인이 아닌, 중앙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포섭하고 경제적으로 보장하는 정책이 성공적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줍니다. 김보 공의 생애는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고려의 제도적 통합 메커니즘이 완성되었음을 상징하는 모범적인 무신 귀족의 초상입니다.
VII.2. 강릉김씨 문중에 미친 영향
김보 공께서 확보하신 중앙 관직인 대장군직과 경정 전시과를 통한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은, 강릉김씨 가문이 지역의 호족 세력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고려 중기 문벌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초석이 되었습니다. 공의 공적은 후손들이 문과 무를 아우르는 명문가로 성장하고 그 세력을 영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시었습니다.
VII.3. 후대에 드리는 존경의 말씀
강릉김씨 11세손이신 김보 공께서 11세기 고려 중흥기의 격동과 영광의 시대에 무관으로서 보여주신 탁월한 역량과 국가에 대한 헌신적인 충성심은 후대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문무 겸비의 대장군으로서 공께서 세우신 공적은 고려사의 빛나는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강릉김씨 문중의 자랑스러운 뿌리로 길이 계승될 것입니다.
일품군(一品軍): 고려시대 주현군(州縣軍)에 소속된 노동부대.
외방역군(外方役軍)·추역군(秋役軍)이라고도 한다. 설립연대는 정확하지 않고, 1031년의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에 처음 보인다.다만 1010년(현종 1)에 세운 「개심사오층석탑형지기」에 광군(光軍)이 확인되고 있어 광군이 일품군으로 개편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설립시기는 대략 1012년에서 1018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일품군은 지방군인 주현군의 하나였다. 주현군은 보승군(保勝軍)·정용군(精勇軍)·일품군·이품군·삼품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보승군·정용군은 전투부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품군은 이품군·삼품군과 함께 동원 목적이 공역(工役)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일품군의 동원은 일반적으로 일정한 주기로 이루어져 교체되었다. 초기에는 2번(番)으로 나누어 가을에 교체했으며, 그 기간은 1년으로 하였다가 1191년(명종 21)부터 3번교대제로 하였다. 일품군의 지휘는 향리가 담당했는데, 이는 일품군이 그 지방농민들로 구성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일품군은 1235년(고종 22) 이후 주현군이 별초군(別抄軍)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소멸되었다. 특히, 같은 주현군 소속 공역군인 이품군·삼품군은 주현에 의해서 파악, 통제되었으나, 일품군은 중앙정부의 직접 파악과 통제를 받았던 서로 별개의 존재였다.
일품군은 신라 말 고려 초까지 지방성주의 군대에서부터 광군을 거쳐 별초군까지 전해 내려오는 오랜 전통의 소산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일품군(一品軍))]
별장(別將): 고려시대 정7품 무관직.
중앙군의 하급장교로서 바로 위의 직위인 낭장(郎將)과 마찬가지로 이군육위(二軍六衛)에 222명이 소속되었고, 그 밖에 도부외(都府外) 2인, 의장부(儀仗府)·견예부(堅銳府)에 각 1인, 충용위(忠勇衛) 20인 등 총 246인이 있었다.정7품관으로 1076년(문종 30) 전시과(田柴科)에 의하면 제11과에 해당하여 전(田) 45결, 시(柴) 12결이 지급되었다. 응양군(鷹揚軍)을 제외한 각 영(領)에 5인씩 배속되어 200인 단위부대의 부지휘관이 된 듯하며, 별장방(別將房)도 있었음 직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별장(別將))]
대장군(大將軍): 고려시대 종3품 무관직.
고려시대 경군에서 상장군 다음가는 직위로, 이군육위 8개 단위부대에 각 1인씩 배속되어 총 8인에 이르렀다. 각 군·위의 부지휘관 임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상장군과 더불어 합의기관인 중방(重房)을 구성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무신의 권력집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장군(大將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