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三世 錫 (1119년 ~ ?) 一一一九年高麗睿宗己亥生官郞將
◎ 김석(錫), 강릉김씨 13세손. 守文의 次男, 長男 광순(光純)은 호장(戶長)
●서기 1119년 고려 예종(睿宗) 14년 기해(己亥)년에 태어나셨다. 문무를 겸비하셨고 무과에 급제하여 충용위(忠勇衛) 별장(別將)과 낭장(郎長)에 오르셨다.

강릉김씨 13세손 김석(金錫) 옹 일대기 연구: 12세기 고려 문무 격변기 중앙 무관의 고찰
제1장. 서론: 강릉김씨 13세손 김석 옹의 시대적 조명
1.1. 보고서의 목적 및 고증 범위
본 보고서는 강릉김씨 13세손이시며 서기 1119년(고려 예종 14년) 기해년에 탄생하신 김석(金錫) 옹의 일대기를 심층적으로 조명하고, 옹께서 활약하셨던 12세기 고려 중기의 역사적 배경과 연관하여 그 의미를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옹께서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시어 무과(武科)에 급제하신 후, 충용위(忠勇衛) 별장(別將)과 낭장(郎將)을 역임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옹의 관직 중 ‘충용위’라는 명칭은 학술적으로 중요한 고증(考證)을 필요로 합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충용위는 1356년(공민왕 5년)에 설치된 군사 조직으로, 옹의 출생 연대와 200년 이상의 시차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본 보고서는 옹께서 실제 역임하셨던 12세기 중앙군 체제인 이군육위(二軍六衛) 내 무관직의 위상과 역할을 학술적으로 재구성하고, 당시 문벌 귀족 사회와 무신(武臣) 간의 갈등 속에서 옹의 생애가 갖는 역사적 가치를 존경의 마음을 담아 분석하고자 합니다.
1.2. 김석 옹 탄생 시기의 고려 개괄 (1119년, 예종 14년)
김석 옹께서 탄생하신 1119년은 고려가 건국된 이래 중기 안정기를 구가하며 문벌 귀족 사회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문치주의(文治主義)가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과거 제도를 통해 관료가 중앙 정치를 운영하는 체제가 정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안정기 이면에는, 지방 세력인 향리(鄕吏) 가문이 중앙 관료로 진출하여 기존 문벌 귀족과 경쟁하려는 신분 이동의 격렬한 움직임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옹의 생애 후반기는 1170년 무신정변을 기점으로 고려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며 혼란스러웠던 무신정권 100년의 서막과 정확히 겹치게 됩니다. 따라서 옹의 행적은 고려 중기의 구조적 모순이 폭발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겪어내신 시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 강릉김씨 가문의 역사적 위상 및 향리 출신 배경
김석 옹의 가문은 강릉 지역의 유력한 토착 세력이었으며, 부친이신 수문(守文)과 특히 형님이신 광순(光純) 옹께서 호장(戶長)을 역임하셨다는 기록은 이러한 가문의 위상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Query data]. 호장은 고려 시대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 계층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으며, 국가를 대신하여 지방을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지방 권력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강릉김씨 가문은 가문의 안정적인 지방 행정 실권(호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동생이신 김석 옹을 무과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시켜 가문의 신분적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치밀한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는 단순한 신분 상승을 넘어, 중앙 정치 무대에서의 영향력과 지방 기반을 상호 보완적으로 확보하려는 고려 중기 엘리트 향리 가문의 전형적인 분화 전략이었습니다.
제2장. 향리 계층의 지위와 중앙 관료 진출 경로
2.1. 강릉 호장 가문의 사회적 및 경제적 기반
김석 옹의 형님이신 광순 옹이 역임하신 호장 직위는 강릉 지역에서 가문이 누리던 막강한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호장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外官)이 오기 전까지는 성주(城主)나 장군(將軍)을 칭하던 호족(豪族)의 성격을 가진 지방 유력자들이 중앙 집권 체제에 흡수되면서 형성된 직위였습니다. 강릉은 동해안의 요충지로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중앙 집권력이 완전히 미치기 어려웠고, 따라서 호장 가문의 영향력은 타 지역보다 더욱 강력하고 반(半)귀족적인 성격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향리 계층의 주요 경제 기반은 토지의 소유와 경작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물적 기반은 가문이 중앙 관직 진출에 필요한 자원과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원천이었습니다. 지방의 실권을 담당하는 형 광순 옹께서 호장으로서 가문의 토착 기반을 견고히 하시는 동안, 김석 옹께서는 중앙 무관으로서 새로운 신분 상승의 길을 개척하신 것입니다. 이는 가문의 신분적 유동성을 극대화하여, 향리가 직역(職役)을 세습하며 중인 신분으로 고착되는 것을 막고 문벌 귀족 사회로의 편입을 시도한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2.2. 고려 전기 향리 제도의 변천과 중앙 흡수
고려 초, 지방 호족은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사심관(事審官)과, 출신 지역에 남아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로 분화되었습니다. 12세기 중반은 이러한 향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던 시점이었습니다. 초기에는 호장의 임명권을 왕실이 가졌으나, 이후 지방관에게 위임되면서 향리는 지방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강릉김씨 가문은 이처럼 중앙의 통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지방 세력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앙 관직 진출을 필수적인 과제로 인식하셨을 것입니다. 김석 옹의 무과 급제는 강릉김씨 가문이 재지(在地) 세력으로서의 기반을 유지하는 동시에, 재경(在京) 관료로서 중앙 정치 무대에 발을 들여놓는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합니다.
고려 초기 중앙 관료와 향리 간의 위계적 연결
제3장. 시대적 격랑: 금(金)나라 사대 외교와 문벌 귀족 사회 (1119년~1146년)
3.1. 김석 옹 성장기의 국제 정세 (1119년~1126년)
김석 옹의 유년기는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고려의 외교 정책이 근본적으로 수정되는 격동기였습니다. 옹이 8세 되시던 1126년은 고려가 새로이 강성한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대해 칭신(稱臣), 즉 신하를 자처하며 사대(事大) 관계를 수립한 해입니다. 불과 10년 전인 1117년, 예종 대에는 금 태조 아골타가 보낸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가 아우인 고려국왕에게’라는 서한을 고려 조정이 묵살하며 여진족을 ‘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로 경멸하던 강경한 태도를 취했었습니다.
그러나 금이 거란(요)을 멸망시키고 국제 질서의 새로운 축으로 등장하자, 고려는 현실적인 힘의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26년, 당시 정권을 전횡하던 권신 이자겸과 척준경의 주도로 백관회의를 거쳐 금에 칭신 상표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외교적 굴욕은 고려 지배층에게 ‘해동천하(海東天下)’라는 자주적 의식을 크게 훼손시켰으며 , 국방력보다는 외교적 실리를 우선시하는 문치주의의 명분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관들의 무력은 상대적으로 경시되는 풍조가 심화되었고, 이는 훗날 무신정변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3.2. 이자겸-척준경 집권기의 중앙 정치 상황
김석 옹의 청년기는 이자겸이 중앙 권력을 완전히 사유화하고 정치를 전횡하던 시기와 겹칩니다. 문벌 귀족들은 음서(蔭敍) 제도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장악하며 그 권세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과거(科擧)를 통해 어렵게 중앙 관직에 진출한 향리 출신 무관들에게는 이러한 폐쇄적인 귀족 사회가 극복하기 어려운 ‘유리 천장’으로 작용했습니다. 옹께서 무과에 급제하여 중앙군에 진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정5품 이상의 고위직으로의 승진이 사실상 봉쇄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신흥 관료들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으며, 문벌 귀족 중심의 통치 체제에 대한 구조적인 불만을 증폭시키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3.3. 고려의 토지 및 경제 제도와 무관의 불안정성
고려의 관료들은 국가로부터 토지의 수조권(收租權)을 지급받아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이를 전시과(田柴科) 제도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문종 때 완성된 경정전시과 체제는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김석 옹께서 최종 직책으로 역임하신 종6품 낭장 직위는, 귀족 신분을 상징하며 3대까지 세습이 가능했던 공음전시(功蔭田柴)의 지급 대상인 정5품 이상 관직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즉, 옹께서는 현직에 있을 때만 토지(수조권)를 지급받았을 뿐, 퇴직 후에는 세습 가능한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을 것입니다. 문신 귀족들은 공음전시를 통해 가문의 부를 대물림할 수 있었던 반면, 옹과 같은 향리 출신 무관들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했으며, 이는 문무 관료 간의 경제적 차별을 심화시켜 무신들의 불만을 키우는 중대한 요인이었습니다.
제4장. 무관으로서의 헌신: 직책 고증과 중앙군 내 위상
4.1. 무과 급제와 중앙군 진출의 의의
향리 계층 자제가 문신 중심의 관료 사회로 진입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는 무과를 통한 중앙 관직 진출이었습니다. 김석 옹께서 무과에 급제하시어 중앙군 무관이 되신 것은, 강릉김씨 가문의 수많은 자원 투입과 옹의 탁월한 무력을 통해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중앙 권력에 편입하는 데 성공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무관 진출은 단순한 직업 선택이 아니라, 가문 전체의 위상을 지방 사족(士族)과는 구별되는 ‘중앙 관료 가문’으로 격상시키는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4.2. 중앙군(2군 6위) 체제와 낭장·별장의 실질적 위상
고려의 군사 제도는 크게 중앙군인 2군(二軍)과 6위(六衛), 그리고 지방군인 주진군(州鎭軍)과 주현군(州縣軍)으로 구성되었습니다. 2군 6위는 국왕의 호위와 개경 수비를 담당하는 핵심 정예군이었으며, 김석 옹께서 역임하신 별장(정7품)과 낭장(종6품)은 이 중앙군 체제의 핵심 지휘관인 부병(府兵) 계통에 속했습니다.
낭장과 별장은 상위 지휘관인 장군(將軍)이나 중랑장(中郎將) 아래에서 실제 부대를 지휘하고 병력을 통솔하는 실무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이는 김석 옹께서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라, 뛰어난 무예와 통솔력을 바탕으로 국왕 호위와 수도 방위의 중추적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셨음을 방증합니다. 옹께서 정7품 별장에서 종6품 낭장으로 진급하셨다는 사실은, 문신 우위 체제 속에서 향리 출신 무관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실무직까지 도달하신 탁월한 경력을 보여줍니다.
4.3. 충용위(忠勇衛) 명칭에 대한 학술적 고증
김석 옹의 직책 기록에 등장하는 ‘충용위’는 학술적 연대 고증이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충용위는 1356년(공민왕 5년)에 반원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국왕 호위 강화를 위해 설치된 군사 조직입니다. 이 시기는 김석 옹께서 활약하셨던 12세기 중반으로부터 200년 이상 후대의 일입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김석 옹에 대한 가전(家傳)이나 족보 편찬 과정에서 시대적 오기(誤記)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옹께서 실제 역임하신 부대는 12세기 당시 2군 6위 내의 근위(近衛) 부대 중 하나였을 것이며, 낭장과 별장 직위는 궁성 숙위(宿衛)를 담당하는 핵심 무관이었습니다. 후대의 기록자가 선조의 권위를 높이고자 당시 2군 6위의 근위 부대 직책 대신, 후대에 공민왕의 개혁 군대로서 권위가 높았던 ‘충용위’의 명칭을 차용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2세기 고려 중앙군(2군 6위)의 무관 주요 품계 및 김석 옹의 지위
제5장. 문무 차별의 심화와 무신정변 전야 (1146년~1170년)
5.1. 문신 우위 사회 속 무관의 지위와 차별
김석 옹께서 낭장으로 복무하시던 시기, 특히 인종과 의종 대에 이르러 문무(文武) 간의 차별은 극에 달했습니다. 고려 왕실은 문치주의를 표방하며 문신들을 우대했고, 무관들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했습니다. 옹과 같은 향리 출신 무관들은 무과를 통해 중앙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신 귀족들의 권력 독점 앞에서 승진의 좌절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모욕과 경시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낭장 계층은 2군 6위의 실질적인 병력을 지휘하는 중간 지휘관이었으므로, 문신들이 주최하는 연회나 행사에 참석하여 문신들의 온갖 수모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했습니다. 경제적 기반(세습 가능한 토지 부재)의 취약함과 사회적 지위의 경시는 결합되어, 옹과 같은 중견 무관들에게 깊은 구조적 분노를 누적시켰습니다. 이러한 낭장 및 별장 계층의 분노는 1170년 무신정변의 발발을 이끈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되었습니다.
5.2. 12세기 귀족 문화와 무관 계층의 괴리
김석 옹께서 활동하신 12세기는 고려의 문화적 황금기였습니다. 정교하고 세련된 청자(靑磁), 금속 공예, 나전칠기 등이 발달하여 귀족 문화의 화려함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예술과 사치의 향유 계층은 주로 문신 귀족들이었습니다.
김석 옹과 같은 무관 지휘관들은 이 화려한 귀족 문화를 수호하고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나, 그 문화의 중심부에서는 소외된 위치에 있었습니다. 중앙군 무관이 지방의 호장 가문 출신이었다는 배경까지 고려할 때, 옹께서는 개경 귀족 사회의 우아함과 그들로부터 받는 차별 사이에서 심리적 괴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는 무관들의 불만을 단순한 직업적 차별을 넘어선 계층적 모순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5.3. 군역 제도와 중앙군 지휘관의 일상
고려의 군역(軍役)은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가 직접 군인이 되거나 포목 등을 내어 수행하는 신역(身役)이었습니다. 옹이 지휘하셨던 2군 6위 중앙군은 평상시에는 궁성 숙위(宿衛)와 개경 수비에 집중되었습니다.
특히 12세기 초중반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 수립 이후, 큰 외적의 침입이 없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무관들은 무력을 실제로 발휘할 기회가 박탈되었고, 중앙군 지휘관의 임무는 지루한 숙위 업무와 문신들의 의전 행사를 보조하는 하위 직역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직무 경시와 권태는 문무 차별과 결합하여 무관들의 불만을 내부적으로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제6장. 자연 환경과의 조화: 12세기 기후, 식생 및 강릉 지역 특성
6.1. 고려 중기의 한반도 기후 환경 분석
김석 옹께서 생존하셨던 12세기 고려 중기는 후빙기 기후 최적기 이후의 온난화 경향이 지속되던 시기였습니다. 한반도의 저해발 지역은 온난하고 습윤한 환경이었으며, 냉온대 중부 식생형의 전형인 하록활엽수림(夏綠闊葉樹林)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기였습니다. 참나무속(Quercus), 느릅나무속(Ulmus), 서어나무속(Carpinus) 등이 대표적인 식생이었으며, 이는 오늘날 한반도 산림 경관의 전형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평화롭고 온화한 기후는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적은 환경을 제공했으며, 이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중앙군이 전투 대비보다는 궁성 숙위에 집중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6.2. 강릉 지역의 지리적 특성 및 농업 환경
강릉김씨 가문의 기반이었던 강릉 지역은 동해안의 지리적 특성상 농업 환경에 대한 중앙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강릉 지역은 가뭄에 취약한 기록이 역사적으로 존재합니다.
호장 가문으로서 옹의 가족은 이러한 자연재해가 발생할 경우, 지방 행정 실무 책임자로서 조세 징수와 재해 구호라는 이중의 책무를 지며 큰 부담을 졌을 것입니다. 김석 옹께서 중앙 무관으로 진출하여 중앙 관직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려 하신 것은, 지방의 세습적 직역과 결부된 이러한 지역적 재해 및 행정적 위험으로부터 가문의 일부를 전략적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도 내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7장. 무신정변(1170년)과 김석 옹의 생애 후반부 추론
7.1. 무신정변 발발의 순간과 낭장 계층의 선택 (1170년)
김석 옹께서는 1170년 8월 30일(음력)에 발생한 무신정변 당시 51세의 중견 지휘관이셨습니다. 무신정변은 보현원 사건을 기점으로, 문신들의 누적된 차별과 멸시가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정변의 주체는 2군 6위의 실질적인 병력을 지휘했던 낭장, 별장 등 중하급 무관들이었습니다. 51세의 낭장은 중앙군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며 부하 병력에 대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문신들의 모욕을 직접 겪어온 세대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옹께서는 정변이 발발했을 때, 이를 주도하는 핵심 결정권자 중 한 명이셨거나, 혹은 최소한 정변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병력 집단의 지도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옹의 직책은 중앙군 호위 부대에 소속된 실무 지휘관이었으므로, 정변 발생 시 그 어떤 무관보다도 중요한 위치에 계셨을 것입니다.
7.2. 김석 옹의 정변 참여 및 행적 추론
김석 옹의 행적 기록은 낭장 직책을 마지막으로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는 무신정변 이후 고려 사회가 겪은 극심한 권력 투쟁과 혼란 속에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기록의 공백일 수 있습니다. 1170년 이후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등 최고 권력자가 쉴 새 없이 바뀌고 김보당, 조위총의 난과 같은 내전이 이어지는 극도의 불안정기였습니다.
만약 옹께서 정변 초기 주도층에 합류하여 문신 중심의 체제를 전복하는 데 기여하셨다면, 무신정권 초기에 큰 이득을 얻어 가문의 위상을 더욱 높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무신들 간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이고나 이의방이 살해당했듯이, 옹께서도 권력 갈등에 휘말려 숙청되셨거나, 혹은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은퇴하셨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옹의 생애는 문벌 귀족 사회의 안정기(성장기)를 거쳐, 국제적 굴욕과 내부 부패가 심화된 중장년기를 지나, 결국 무력에 의한 체제 전복(노년기)을 목격하고 관통하신 12세기 고려의 가장 격렬한 흐름 자체를 대변하고 계십니다.
제8장. 결론: 강릉김씨 김석 옹의 역사적 가치와 재조명
김석 옹의 일대기는 12세기 고려 사회가 겪었던 구조적 변동, 즉 지방 향리 계층이 중앙 관료로 신분 상승을 시도하는 과정과 문무 차별의 심화가 결국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씨앗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술적 고증을 통해 ‘충용위 별장 및 낭장’ 직책이 12세기 중앙군 이군육위(二軍六衛) 체제 내의 핵심 실무 무관직(별장 정7품, 낭장 종6품)이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는 옹께서 뛰어난 능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문신 우위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시고, 가문의 염원이었던 중앙 관료의 지위를 확고히 하셨음을 증명하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옹의 경력은 당시 지방 토착 세력이 중앙 권력에 접근하고자 했던 치열한 노력을 상징하며, 훗날 100년간 지속될 무신정권의 토대를 마련하신 무관 세력의 중추에 계셨던 인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강릉김씨 후손들은 김석 옹의 공헌을 통해 향리 계층의 한계를 벗어나 중앙 정치 무대에 발을 들여놓으신 선조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며, 그분의 생애가 고려 중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변곡점과 일치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충용위(忠勇衛)
충용위는 1356년(고려 공민왕 5) 11월에 설치되었다. 이해 5월부터 공민왕이 기철(奇轍)·권겸(權謙)·노책(盧頙) 등 부원배(附元輩)들을 죽이고, 이어서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한 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는 등 대대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했는데,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만 세력으로부터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충용위는 모두 4위(衛)로 구성되었으며, 각 위(衛)마다 장군(將軍) 1인, 중랑장(中郞將) 2인, 낭장(郎將) 2인, 별장(別將) 5인, 산원(散員) 5인, 위장(尉長) 20인, 대장(隊長) 40인이 배치되었다. 따라서 충용위의 총 정원은 300명인 셈이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궁성을 지키는 것이며, 이 밖에 외적의 침입을 당하면 개경 주위의 수비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국왕의 호위와 도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중앙군으로는 2군 6위가 있었다. 2군 6위는 지휘관인 장군(將軍)을 제외하면 5품 이하 중랑장(中郞將), 낭장(郎將), 별장(別將), 산원(散員), 교위(校尉), 대정(隊正)에 이르는 부병(府兵)과 보승(保勝)·정용군(精勇軍)으로 이루어진 농민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승·정용군 등은 지방에서 번상(番上)하는 농민병으로서 정예 병력은 아니었다. 2군 6위의 실제 군사력을 이루는 것은 중랑장(中郞將)~대정(隊正)에 이르는 부병(府兵)이었다. 이들은 평상시 농민병을 지휘·통제하면서 국왕의 호위와 개경의 수비를 담당하였고, 비상시에는 이들을 골간으로 하고 지방군을 포괄하는 3군(軍), 혹은 5군(軍)을 확대 편성하여 대처하였다. 부병은 평상시, 비상시를 막론하고 고려 군대의 중추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후기에 들어와 부병의 군사력은 부실해져갔다. 무신집권기에는 집권자의 마음대로 부병이 임명되었으며, 승진에는 뇌물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원간섭기에 들어와 더욱 심화되었다.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의 시행으로 부병직은 합법적인 매매의 대상이 되었고, 귀족의 어린 자제들과 문인들이 음서(蔭敍) 등을 통해 부병직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국왕의 실질적인 호위 병력은 지극히 부실해졌다. 따라서 원간섭기 이후 국왕들은 자신들의 호위 병력을 별도로 마련하고자 하였다. 즉 충렬왕은 즉위하자마자 원(元)에 볼모로 다녀온 의관 자제를 모아서 홀치[忽赤]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부병과는 별도로 만들어진 국왕 호위병의 첫 사례이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만들어진 충용위 역시 장군 이하 중랑장, 낭장, 별장, 산원, 위장, 대장 등으로 이루어져 부병의 조직과 동일하지만 부병에 속하지 않는 국왕 호위병이다. 충용위는 1357년(고려 공민왕 6) 왜구가 강화도 교동(喬桐)을 침범하자 이를 막기 위해 출병하는 등 주 임무인 국왕의 호위 외에도 왜적을 토벌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그런데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복주(福州 : 현 안동)로 피신했을 때 제구실을 하지 못해 혁파가 논의되기도 했으나, 그대로 잔존했다. 그 뒤에도 홀치[忽赤] 등과 같이 왕의 숙위부대라는 것을 빙자해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는 등의 민폐를 끼치고, 또한 이의 존재로 인해 정규 군사조직인 2군 6위(二軍六衛)의 체제가 허설화되어 곤란하다는 이유로 그 혁파가 자주 논의되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 헌사(憲司)에서는 애마(愛馬)들의 폐해와 2군 6위 제도의 유명무실함을 거론하면서 충용위를 신호위(神虎衛)에 합칠 것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폐지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되면서 10위가 정비될 때에도 잔존하였다가 이후 군사제도가 더욱 정비되면서 태종 때에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