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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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사는 시대의 외로움과 시니어 세대의 지혜

요즘 우리는 ‘마을’을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만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도시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집과 집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도 마음의 거리는 더 멀어졌습니다.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눈인사를 나누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시대—이것이 지금의 ‘마을 없는 사회’입니다.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

영국 작가 루이즈 페리(Louise Perry)는 “우리는 공동체를 그리워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들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친구 엘리자베스는 런던 한복판에서 작은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남편, 두 자녀, 그리고 두 명의 친구가 함께 한 집에 살며 생활비를 나누고, 아이를 함께 돌보고, 식사를 같이 하는 일상—그녀는 그 안에서 ‘작은 수도원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해 공동의 식사로 이어집니다. 서로의 아이를 봐주고, 어려움이 생기면 나서서 돕습니다. 이 단순한 생활 속에는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중요한 가치, 즉 ‘함께 사는 법’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어느 시기이든 의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기일 때는 부모의 손길이 필요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녀나 이웃의 손길이 절실합니다.

독립이 아름다운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환상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애초에 ‘혼자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마을의 부재’가 만든 고립의 시대

특히 현대 사회의 1인 가구, 은퇴 세대에게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합니다.

한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1인 가구는 2010년 54만 명에서 2025년에는 2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단순한 인구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돌봄의 해체’를 뜻합니다.

옛날에는 이웃이 곧 가족이었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나물 한 줌을 나누고, 아이가 울면 누가 됐든 달려가 달래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웃의 이름조차 모르는 채 10년을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돌봄’이 돈으로 거래되고, ‘정’이 서비스로 대체된 사회—이것이 현대의 고립 구조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공동주거’나 ‘협동조합 주택’ 같은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족이 함께 사는 공유주택, 시니어들이 모여 사는 코하우징(co-housing) 모델이 그것입니다. 이런 시도들은 단순히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관계 맺고 싶은 본능에서 비롯됩니다.

여성과 돌봄, 그리고 세대의 지혜

루이즈 페리는 흥미로운 관찰을 덧붙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본래 공동체의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혼자 아이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출산과 육아는 ‘여성들의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중심에는 늘 할머니 세대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여성은 다른 종보다 오래 살아남는데, 그 이유는 후세를 돌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대 간 돌봄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인류 생존의 본능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 연결고리가 끊어졌습니다. 육아는 부모의 책임으로만 남고, 시니어는 ‘은퇴자’로 분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젊은 부모는 지치고, 노인은 외로워졌습니다. 두 세대가 각자의 방에 갇힌 채 서로의 존재를 잃어버린 셈입니다.

사실 시니어 세대야말로 ‘마을을 다시 세울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삶의 경험과 여유, 타인에 대한 이해를 가진 세대가 젊은 세대를 품을 때, 비로소 사회는 따뜻해집니다. ‘돌봄’은 다시 젊음의 몫이 아니라, 세대 간 순환의 형태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돌봄의 윤리 — 자유와 의무 사이

공동체의 삶에는 분명 제약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동시에 누군가를 책임져야 함을 뜻합니다. 자유는 줄어들지만, 그 대신 깊은 유대감이 생깁니다. 이것이 진짜 ‘마을의 윤리’입니다.

현대의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독립’을 강조했지만, 그 이면에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자율성을 얻는 만큼, 관계는 끊어집니다. 특히 육아기의 여성들이 가장 크게 느끼는 결핍은 ‘시간’이 아니라 ‘함께해 줄 사람의 부재’입니다. 엘리자베스가 말한 것처럼, “마을이란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 간섭하고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니어 세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관계는 서로 폐를 끼치는 과정 속에서 자랍니다. 완벽한 독립은 관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시니어 세대의 ‘두 번째 마을’을 위하여

한국 사회는 이제 ‘두 번째 마을’을 고민해야 합니다. 한때는 직장, 교회, 학교, 시장이 마을의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모두 기능적 네트워크로 분해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 다시 찾는 공동체는 ‘의미’와 ‘정’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이웃과 함께 밥을 짓고, 돌봄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단순한 행동들이 시니어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혼자여도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판 마을의 출발입니다. 지금 일부 지역에서는 시니어 코하우징, 공동식당, 마을건강센터 같은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공간은 복지가 아니라 관계의 복원 장치입니다. 디지털 시대일수록 인간적 관계는 기술이 아닌 손과 눈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루이즈 페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을은 완벽하지 않다. 간섭도 많고, 불편하고, 시끄럽다. 그러나 외롭지 않다.” 시니어 세대가 다시 마을을 세운다면, 그것은 젊은 세대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 모든 것은 결국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함께’라는 말이 낯설어진 지금, 우리는 다시 ‘함께 사는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웃의 문을 두드리는 일, 젊은 세대에게 밥 한 끼를 내어주는 일, 그것이 어쩌면 잃어버린 마을을 되찾는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