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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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두렵다는 청년들에게 노(老) 교수가 건넨 처방은 인문학이었습니다

지난 5년 사이 미국 대학 캠퍼스의 화젯거리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2020년 가을만 해도 미국 듀크대학교 구성원들의 입에 오르내린 단어는 오로지 코로나19뿐이었습니다. 학생과 교직원은 얼마나 자주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확진자는 며칠을 격리해야 하는지가 모든 대화의 처음이자 끝이었습니다. 강의실 마스크 착용은 의무였고 50인 이상의 사적 모임은 금지되었으며, 이 혼란이 그 시기를 통과한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리라는 깊은 슬픔이 캠퍼스를 덮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학년도가 시작된 지금, 그 캠퍼스에서 코로나19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뉴욕타임스 인터내셔널 에디션 8월 27일 자 9면에 실린 칼럼니스트 프랭크 브루니(Frank Bruni)의 관찰입니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인공지능(AI)입니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AI를 쓰지 못하도록 강의를 다시 짜고 과제를 손보며, 학생들은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지를 점치면서 예방적으로 자기 전공을 고릅니다. AI의 편재성(遍在性)은 그야말로 획기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브루니는 여기서 한 걸음 물러서서 묻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5년 뒤에는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또 다른 이름의 유령이 젊은이들을 떨게 할 것이며, AI는 컴퓨터의 최종 승리나 인류의 하찮음을 알리는 신호로 남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 AI는 다만 미래를 그 어느 때보다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속하는 변화 속도의 한 징후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맹렬한 신진대사와 미칠 듯한 불확실성. 이것이 오늘의 청년들이 진로를 정할 때 통과해야 하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처방은 의외로 고전적입니다. 가장 안전한 계획은 지금 당장 실용적으로 보이는 것을 좇는 일이 아니라, 어떤 기술도 뛰어넘고 어떤 유행보다 오래 살아남는 영속적으로 유용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문학, 역사, 인류학, 철학처럼 오래된 교양 학문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주장이 대학 안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실리콘밸리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나옵니다. AI 기업 앤스로픽(Anthropic)의 사장 다니엘라 아모데이(Daniela Amodei)는 AI의 등장이 오히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의 값어치를 높인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구글 랩스(Google Labs)에서 AI 연구를 해온 스티븐 존슨(Steven Johnson)은 올해 한 인터뷰에서 지금의 흐름이 인문학의 복수를 촉발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홍보 전략이라는 의심을 걷어내고 보아도, 인간의 열망과 나약함과 재능과 버릇에 대한 통찰이 AI를 관리하는 중대한 결정에 정보를 제공하리라는 논리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경고음도 함께 울리고 있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이달 기사에서 AI 에이전트가 거짓말하고, 속이고, 훔치는 성가신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통제된 상태를 벗어나 유해한 무리를 이루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데이터 센터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기술의 부상을 늦추거나 멈춰 세우려는 욕구가 동시에 자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래된 지혜를 다시 꺼내 들게 됩니다. 문학은 화려한 언사와 허풍 섞인 이야기의 창고가 아닙니다. 무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형태로 빚어진 진리의 도서관이며, 감성 지능을 단련하는 운동장입니다. 정치인을 평할 때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희극이 얼마나 자주 기준점 노릇을 하는지,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요즘 얼마나 자주 인용되는지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에 유창하지 못한 사람은 오늘을 제대로 잇지 못합니다. 과거를 공부한다는 것은 연도를 외우는 일이 아니라 인과관계와 탐욕과 선의, 그리고 사건의 물길을 정하는 힘들의 상호작용을 배우는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시니어 독자 여러분께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손주 세대의 진로를 걱정하며 무슨 학과가 유망하냐는 질문을 받으실 때입니다. 지난 20여 년간 컴퓨터 관련 학과로 몰리던 행렬이 이제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행을 좇는 선택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줍니다. 시류에 맞춰 전공을 고르는 일은 언제나 반 박자 늦습니다. 오히려 읽고 쓰고 생각하는 근육을 길러 두는 편이 어떤 기술 변화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자산이 됩니다.

둘째, 그 조언은 시니어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세대가 살아오며 축적한 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입니다. 겪은 일을 맥락 속에 놓고 해석하는 능력, 사람의 속내를 읽어내는 감각,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오래된 저울은 기계가 흉내 내기 가장 어려운 영역입니다. 기기 조작에 서툴다는 이유로 위축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정작 부족한 것은 기계를 다루는 손재주가 아니라, 기계가 내놓은 답을 판별할 줄 아는 사람의 안목이기 때문입니다.

봇들이 내일의 황제가 되든 에드셀(Edsel), 곧 실패한 자동차의 대명사가 되든, 생각의 근육을 단련해 둔 사람에게는 그것이 유용하게 쓰이리라는 것입니다. 대학을 기술을 담는 가방이 아니라 마음의 교양을 쌓는 곳으로 여기자는 그의 제안은, 결국 오래된 것의 값어치를 지키자는 보수적인 호소이기도 합니다. 미쳐버린 듯 빠르게 돌아가는 신세계일수록, 우리는 헉슬리가 남긴 그 멋진 신세계를 다시 펴 들어야 하겠습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