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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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교실, 사라진 기준

최근 여러 나라에서 학교 현장의 혼란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교권은 흔들리고, 다문화·이민 배경을 지닌 학생의 비율은 꾸준히 늘어나며, 교사와 학생, 학교와 지역사회 사이의 신뢰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른들은 흔히 두 갈래 길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는 문제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으로만 대응하는 방임이며, 다른 하나는 학생의 처지를 지나치게 동정한 나머지 원칙 없이 감싸기만 하는 온정주의입니다.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청소년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방임과 구원자 증후군 사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이 지난 8월 24일자(하이케 슈몰 기자, 베를린) 지면에서 소개한 바에 따르면, 베를린의 교육자 엔긴 차틱(Engin Çatık)은 폭력과 저성취로 악명 높던 위기 지역 학교 두 곳을 짧은 기간 안에 안정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터키계 손님노동자(Gastarbeiter, 1960년대 노동력 부족을 겪던 독일이 협정을 통해 받아들인 외국인 노동자를 이르는 말) 가정의 후손으로, 부친이 도박으로 가정을 파탄시키고 끝내 장기간 수감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홀로 네 자녀를 키워낸 어머니, 그리고 그를 믿어준 교사와 축구 감독들 덕분에 그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교육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교장으로 부임한 차틱은 매일 아침 교문에 서서 모든 학생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이름을 기억하며 지각과 복장을 점검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쉬는 시간에 벌어지는 이른바 ‘목덜미 때리기’ 같은 사소해 보이는 장난이 실은 서열 다툼과 맞닿아 있음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습니다. 그가 시종일관 경계한 것은 두 가지, 즉 학생을 방치하는 무관심과, 학생의 처지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원칙 없이 감싸는 이른바 ‘구원자 증후군(Helfersyndrom)’이었습니다. 그는 설령 베를린 학생의 70퍼센트가 최소 학업 기준에 미달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해당 보도에 인용된 발언으로 공식 통계와는 별도의 확인이 필요한 수치임을 밝혀 둡니다.

방임과 과보호, 두 극단의 함정

차틱의 사례가 시사하는 구조적 원인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청소년에게 명확한 한계와 기대치를 제시하지 않으면 소속감과 자기 존중감을 기를 기회를 잃습니다. 반대로 잘못된 행동조차 문제 삼지 않고 무조건 감싸기만 하면, 학생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해 낼 동기를 갖지 못합니다. 특히 이민자·소수자 가정의 청소년일수록, 자신을 믿어주면서도 잘못은 분명히 지적해 주는 어른을 만난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훗날 극단주의 단체에 포섭될 위험도 달라진다는 것이 해당 보도의 핵심 진단입니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한 개인의 헌신만으로 지속되기는 어렵습니다. 차틱 자신도 정서적 소진을 겪은 뒤 코칭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후 개별 학교를 넘어 교원 행정 기관으로 자리를 옮겨 교사들이 소진되지 않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결국 애정과 훈육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제도적 지원 위에서 함께 작동해야 하는 두 축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

이러한 진단은 한국 사회에도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학교 폭력과 교권 침해 논란이 반복되고 다문화 가정 자녀 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가운데, 우리 사회 역시 원칙 없는 관용과 애정 없는 통제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시니어 세대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습니다.

오랜 사회생활과 자녀 양육의 경험을 축적한 시니어들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애정을 표현할 줄 아는, 이른바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세대입니다. 은퇴한 교사와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각계 시니어들이 학교 멘토링이나 교육 봉사에 참여한다면, 이는 단순한 사회공헌 차원을 넘어 흔들리는 교육 현장에 실질적인 안정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칙 있는 신뢰가 답이다

방임은 자유가 아니며, 무조건적 포용 역시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믿어주되 잘못은 분명히 짚어 주는 어른, 그리고 그 신뢰가 흔들리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원칙입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켜 온 어른과 아이 사이의 위계와 책임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질서는 일방적 통제가 아니라 합리적 기준과 상호 존중 위에서 작동해야 지속될 수 있습니다. 베를린의 한 교육자가 보여 주었듯, 원칙과 애정을 함께 실천하는 어른이 많아질 때 비로소 다음 세대는 안전하게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