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07일
11-8-1800

– 握りつぶす(にぎりつぶす, 니기리추부수, 붙들다, Crushing People’s Projects)

일본인의 집단 지향성은 어떤 상황에서는 큰 강점으로 작용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파괴적인 결함이 되기도 합니다. 응집력 있고 통일된 팀이 필요할 때, 일본인 집단은 어떤 일이든 해낼 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여러 일본 집단들이 어떤 목표를 향해 협력하면, 그들은 거의 무적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모든 일본 집단의 첫 번째 원칙은 생존(survival)이며, 일상적인 사안에서는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이 사실상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보다 우선합니다. 같은 조직 안의 자매 집단(sister group)까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러한 ‘살아남고 성장하려는 본능(survive-and-grow instinct)’은 경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며, 이로 인해 한 회사가 뛰어난 업적을 달성하도록 자극하기도 합니다. 그 미션이 명확히 이해되고, 또 리더층이 이를 받아들인 한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본 문화에서는 이와 같은 집단 간 경쟁 관계에 부정적인 면도 존재합니다. 집단의 리더들은 어떤 수준에서든 서로 우위를 다투며 경쟁하고, 심지어는 자기 집단 내부의 구성원들과도 경쟁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연장자적 위상(seniority)과 지휘 명분(mandate)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하급 구성원이 상사에게 제안을 올렸을 때(일본에서는 제안이 하위 직급에서 상위 직급으로 올라가는 것이 관례입니다), 상사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제안은 ‘握りつぶす(にぎりつぶす, 니기리추부수, 붙들다, Crushing People’s Projects)’라 불리는 제도화된 절차, 즉 “손으로 꽉 쥐어 으깨버리기(grasping and crushing)”에 회부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 제안은 그 자리에서 죽은 제안(dead proposal)이 되는 것입니다.

관리자가 ‘握りつぶす(にぎりつぶす, 니기리추부수, 붙들다, Crushing People’s Projects)’를 행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첫째, 제안을 낸 부하 직원이 그것을 통해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둘째, 그 제안이 관리자의 개인적 의제(personal agenda)와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제안이 다루는 주제나 관련된 사람 또는 회사를 관리자가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넷째, 공식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기 곤란하므로, 묵살(silence)을 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관리자가 그 제안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경험 부족이나 무지(ignorance)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예 제안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만약 제안자가 자신의 상사를 건너뛰어 더 높은 직급자나 회사의 대표에게 직접 호소하려 한다면, 그것을 일본에서는 ‘직소(直訴, じきそ)’라고 부릅니다. 이는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옛날 일본 봉건 시대에는, 하급자가 지방 관리나 영주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면 실제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비록 정당한 이유로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명령 체계의 파괴(break in the chain of protocol)는 대역죄(capital offense)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늘날 일본 기업에서도, 상사가 부하의 제안을 짓눌러버렸을 때, 그 하급자가 직소직소(直訴, じきそ)를 감행하는 일은 드뭅니다. 그 대신 제안을 ‘살리고 싶은’ 상위 경영자가 있다면, 그가 직접 그 제안을 부활시키거나(resurrect) 추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제안을 낸 사람은 회사 내에서 곤란한 입장에 놓이거나, 심하면 상사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경력상 손실을 입기도 합니다.

‘니기리쓰부스’는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 기업 외부의 사람들—즉, 다른 회사의 직원, 협력업체, 또는 외국 기업의 제안자들—역시 같은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안을 올린 후, 그것이 완전히 묻혀버리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비공식적인 후속 점검(follow-up)을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제안 대상 회사와 좋은 인맥(good connections)을 가진 제3자가 나서서 대신 점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습니다.

제안을 받은 일본 개인이나 기업이 그 제안을 몇 달, 때로는 몇 년 동안 ‘보류 상태(sitting on it)’로 두는 것 역시 일종의 거절 방식(saying “no”)입니다.

이것은 일본 기업들이 과거부터 사용해 온 전형적인 방식으로, 기술·공정(process)·제품에 대해 명시적 약속(commitment) 없이도 정보를 더 많이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 왔습니다.

‘握りつぶす(にぎりつぶす, 니기리추부수, Crushing People’s Projects)’는 문자 그대로 ‘손으로 꽉 쥐어 으깨버리다’는 뜻이며, 조직 내에서 불편한 제안이나 추진안, 새로운 아이디어를 조용히 묵살하는 일본식 조직 행동을 가리킵니다. 즉,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상급자가 의도적으로 진전을 막고 무력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일본의 위계적 문화 속에서, 제안을 무시하는 것은 공식적인 거절보다 더 강력한 부정의 표현이자, 동시에 갈등을 피하는 ‘사회적 기술’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일본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도 잘 아실겁니다. 기껏 전문가를 영입시켜서 그 전문가의 얘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리석은 일만 반복하는 국내 기업들을 많이 지켜봤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릴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어쩌면 인간적인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