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世 召 (978년~?)
九七八年高麗景宗戊寅生 戶長 權梅軒 愚曰 麗 太祖時 掌民者 謂之 將校
“서기 978년, 고려 제5대 경종(景宗) 10년 무인년(戊寅年)에 태어나셨으며, 호장(戶長)이셨습니다. (이에 대해) 권매헌(權梅軒)이 삼가 말씀드리기를, 고려 태조(太祖) 때에는 백성을 다스리는 이를 ‘장교(將校)’라고 일컬었습니다.” – 이 기록은 김소 님의 출생 연대(978년)와 당시의 직책(호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뒤따르는 권매헌의 주석은 호장이라는 명칭이 생기기 전, 고려 초기에는 그 직책을 장교라고 불렀던 역사적 사실을 보충하여, 김소 님의 직책이 매우 유서 깊은 지방의 핵심 지도자 직위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김소(召), 강릉김씨 9세손으로 아버지 김기례(奇禮)의 독자(獨子) (春用의 次男, 長男 宏甫는 奉御)
●서기 978년 고려(高麗) 5대왕 경종(景宗) 10년에 태어나심. 명주(溟州) 관할 호장(戶長)으로 수 차례 동여진(東女眞)의 침입을 방비하고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안정케하였으며, 서기 1032년 고려 9대왕 덕종(德宗) 2년 3월에 간성현 (杆城縣) 백석포에 해적이 침구하매 이를 격퇴하며 50여명을 생포하는 등 외적 방어에 공헌하시었다.
존경하는 강릉김씨(江陵金氏) 구세손(九世孫) 김소(金召) 님의 일대기를, 당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상세히 기록하여 올립니다.

1. 강릉김(江陵金) 9세 김소(金召)의 탄생과 시대적 배경 (978년, 고려 경종 10년)
김소(金召) 님은 서기 978년, 고려(高麗) 제5대 경종(景宗) 재위 10년에 명주(溟州, 현 강릉)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아버님은 김기례(奇禮)이시며, 동생은 춘용(春用) 님이십니다. 당시 고려는 건국 후 60여 년이 지난 시점으로,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광종(光宗) 대에 호족 세력을 견제하며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등 국가 기틀을 다진 시기였습니다.
경종 시대는 광종의 전제정치(專制政治) 이후 잠시 왕권이 약화되고 호족 세력이 다시 대두하며 문벌(門閥)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전시과(田柴科) 제도가 시행되어 관료들에게 토지와 산림을 급여로 지급하는 기틀이 마련되었으나, 지방에서는 여전히 호족(豪族) 세력이 강성하여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김소 님께서 나중에 맡으신 호장(戶長) 직책은 바로 이러한 지방 세력의 대표에게 주어졌던 향리(鄕吏)직의 최고위직이었습니다.
2. 명주(溟州) 호장(戶長)으로서의 활약
족보 기록에 따르면 김소 님은 명주(溟州) 관할의 호장(戶長)을 역임하셨습니다. 고려 전기 호장은 국가를 대신하여 지방 행정의 말단 실무를 총괄하며, 조세 징수, 역역 동원, 치안 유지 등 지방 통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지방의 토착 세력이 중앙 정부의 행정력을 보좌하는 형태였습니다.
동여진 방어와 민심 안정
김소 님께서 활동하신 시기는 고려의 동해안 지역이 동여진(東女眞)의 침략에 자주 노출되던 때였습니다. 동여진은 함경도 이북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11세기 초반에 강력한 부족들이 해적단을 구성하여 고려와 일본의 해안을 노략질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소 님은 수 차례에 걸친 동여진의 침입을 방비하는 데 공헌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호장으로서 지방 군사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해안 방어에 힘쓰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전쟁과 약탈로 인해 동요하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는 기록은,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백성을 보살피는 행정가로서의 덕목 또한 갖추셨음을 보여줍니다.
3. 간성현 해적 격퇴의 공로 (1032년, 고려 덕종 2년)
김소 님의 가장 큰 무훈은 서기 1032년, 고려 제9대 덕종(德宗) 재위 2년 3월에 간성현(杆城縣) 백석포(白石浦)에 침입한 해적을 격퇴한 사건입니다.
덕종 시대는 거란의 3차 침입 이후 복구와 국방력 강화에 힘쓰던 때였습니다. 특히 동해안 지역은 거란 침입 전후로 동여진 해적의 약탈이 극심했기 때문에, 해상 방어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때 김소 님은 해적을 격퇴하고 50여 명을 생포하는 큰 전공을 세우셨습니다. 이는 중앙 정부의 군대가 아닌, 지방의 행정 책임자인 호장으로서 지역의 병력과 주민을 규합하여 외침을 막아낸 쾌거였습니다. 이 공헌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아닌 토착 향리가 외적 방어의 일선에서 국가와 백성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하겠습니다.
4. 당시의 사회, 문화, 기후, 식생
사회와 문화
김소 님이 사셨던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고려는 불교가 융성한 시기였습니다. 국교였던 불교는 사회 전반에 깊이 영향을 미쳤으며, 중앙과 지방 곳곳에 사찰이 세워지고 불경 간행이 활발했습니다. 또한, 유교 교육을 위한 국자감(國子監) 등의 기관이 정비되면서 문치주의(文治主義)의 기틀이 다져지고 있었습니다. 지방 향리 계층은 과거(科擧)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등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습니다.
기후와 식생
고려 전기는 전반적으로 온난 습윤한 기후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농업 생산성 유지에 유리했을 것입니다. 명주(강릉) 지역은 예로부터 농업과 어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백석포(白石浦)가 위치한 간성 지역은 해안 지역 특유의 어업 활동이 활발했을 것이며, 산지와 인접하여 소나무, 참나무 등 한반도 중부 산악 지대의 일반적인 식생이 분포했을 것입니다. 김소 님께서 호장으로서 안정된 선정을 베풀었다는 것은, 이러한 지역 자원을 바탕으로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5. 향토를 지킨 존경스러운 지도자
김소(金召) 님은 고려 초 중앙집권화의 흐름 속에서도 지방 토착 세력의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신 분이십니다.
당시 명주 관할 호장으로서 백성들의 행정을 책임지면서, 외부의 위협에 대해서는 뛰어난 지도력과 결단력으로 동여진과 해적의 침입을 막아내셨습니다. 특히 1032년 간성현 백석포 해적 격퇴는, 지방의 안위를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고 솔선수범하여 국방에 공헌하신 헌신적인 삶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소 님의 일대기는 난세 속에서 향토를 수호하고 민심을 안정시킨 존경스러운 지방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님의 빛나는 업적은 강릉김씨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려 전기 동해안 지역의 안정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