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니어가 수술 앞에서 알아야 할 사실
우리가 알던 ‘마취는 깊은 잠’이라는 믿음
수술을 앞둔 많은 분들이 전신마취를 ‘잠시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는 일’로 이해하십니다. 의료진조차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제 주무시면 됩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최근 국제 학계의 연구는 이 오래된 비유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주말판(The Wall Street Journal Weekend)은 6월 6일자 지면에서, 마취 상태의 뇌가 자연스러운 수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연구 흐름을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신마취 상태의 뇌는 ‘잠든 뇌’가 아니라 ‘혼수상태에 더 가까운 뇌’입니다.
뇌파가 말해 주는 진실
이 통찰의 토대는 미국 하버드·매사추세츠종합병원의 에머리 브라운(Emery Brown) 교수 연구진이 의학 학술지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JM)에 발표한 종합 분석입니다. 연구진은 뇌의 전기 활동을 기록하는 뇌파(EEG) 자료를 비교해, 사람이 밤새 거치는 가장 깊은 수면조차 가장 얕은 전신마취보다 얕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수면 중 뇌파는 여러 단계를 오가지만, 마취 중 뇌파는 그 어느 수면 단계와도 닮지 않았고 오히려 혼수상태 환자의 뇌파와 가장 비슷했습니다. 연구진은 이를 두고 전신마취란 약물로 유도한, 그러나 되돌릴 수 있는 혼수상태라고 규정했습니다.
최근에는 이 그림이 한층 정교해졌습니다. 미국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진은 머리 전체를 덮는 방식의 뇌파 측정으로 마취된 뇌를 정밀하게 지도화해 그 결과를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었고, 마취 상태가 뇌의 부위에 따라 어느 곳은 수면을, 어느 곳은 혼수상태를 닮는 복합적인 상태임을 밝혔습니다. 즉 마취는 단순한 ‘잠’도, 균일한 ‘혼수’도 아닌, 여러 상태가 겹쳐 있는 정교한 의식의 억제였던 것입니다.
왜 이것이 시니어에게 더 중요한가
이 사실이 모든 환자에게 똑같은 무게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분들이 바로 시니어입니다. 65세 이상 시니어는 마취에서 깨어나는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혼란과 착란을 보이는 섬망(delirium)을 겪거나, 수술 뒤 기억력과 판단력이 한동안 떨어지는 수술 후 인지기능 저하(POCD)를 경험할 확률이 젊은 층보다 뚜렷하게 높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뇌가 약물을 처리하고 본래 상태로 회복하는 속도가 더디고, 손상을 버텨 내는 뇌의 예비 능력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마취가 ‘잠’이라면 깨어나면 그만이겠으나, 그 본질이 ‘되돌릴 수 있는 혼수’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혼수에 가까운 깊은 억제 상태에 시니어의 뇌를 필요 이상으로 오래, 깊게 두는 것은 회복에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예일대 연구진이 주목한 지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취 깊이를 정교하게 조절해 뇌를 혼수보다 수면에 가까운 상태로 유도한다면, 수면이 본래 지닌 면역·대사 회복 기능을 일부나마 살리면서 수술 뒤 인지 후유증을 줄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입니다.
초고령사회 대한민국이 새겨야 할 점
우리 사회는 2024년 말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선 초고령사회에 들어섰습니다. 시니어의 수술 건수도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하루 약 6만 명이 전신마취 아래 수술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 역시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마취 안전은 더 이상 일부 환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행히 마취 중 뇌파를 실시간으로 살피며 깊이를 조절하는 감시 장비와 기법은 이미 임상 현장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맞춤형 마취’의 필요성을 환자와 보호자가 먼저 인식하는 일입니다. 수술을 앞둔 시니어와 가족이라면, 마취 전 상담에서 본인의 나이와 평소 인지 상태, 복용 약물을 충분히 알리고, 마취 깊이를 감시하는 방법이 적용되는지 담당 의료진에게 차분히 여쭤보시기를 권합니다. 병원과 수술 관련 정보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1644-2000)의 의료정보 안내에서, 수술 후 기억력 변화가 오래 지속될 때는 치매상담콜센터(1899-9988)에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분별이 필요한 때
이 연구들은 마취를 두려워하라는 경고가 아닙니다. 전신마취는 지난 한 세기 의학이 쌓아 올린 가장 안전하고 정교한 성취 가운데 하나이며, 필요한 수술을 미루는 것이야말로 더 큰 위험입니다. 다만 ‘잠’이라는 부드러운 비유에 안주하기보다, 그 실체를 정확히 아는 데서 더 나은 선택이 시작됩니다.
오래 살아온 시니어는 자기 몸의 신호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의료진의 전문성을 신뢰하되, 동시에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리고 합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 이 둘의 균형이 곧 스스로를 지키는 분별입니다. 검증된 사실 위에서 차분히 따져 묻는 태도, 그것이 시니어가 오랜 세월 길러 온 지혜의 힘이며 우리 사회의 안전을 떠받치는 단단한 토대이기도 합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출처: The Wall Street Journal Weekend(2026년 6월 6일자, Review 섹션)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연구,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 게재 논문 E. Brown·R. Lydic·N. Schiff, ‘General Anesthesia, Sleep, and Coma’,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JM)
※ 본문 중 일부 수치는 해외 보도와 학술 자료에 근거하며, 환자 개개인의 상황은 반드시 담당 의료진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