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05일
10-14-2200

바그다드는 압바스 왕조의 수도로서,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를 아라비아 반도의 변두리인 메디나와 메카, 그리고 비잔틴 접경의 다마스쿠스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중앙 평원으로 옮김으로써 세계사적, 지리적으로 막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단순한 정치적 수도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무역과 지성 교류의 허브로 기능했습니다.

1. 지리적 위치 및 새로운 중심지의 의미

바그다드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인근, 메소포타미아의 중심부에 자리 잡았습니다. 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한 후 740년대에 압바스 왕조는 새로운 집단 결속력(’asabiyyah)을 바탕으로 바그다드를 건설하였고, 이는 제국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압바스 왕조는 무함마드의 이데올로기적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제국 전역의 다양한 문화를 포괄하였으며,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가 하나의 문화적 민족(Kulturnation)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언어적·정치적 통일을 이끌었습니다.

2. 세계적인 문화와 인구의 중심

9세기 바그다드는 이미 아랍인의 인구적 우세가 점차 의미를 잃어가는 초다양성 도시였습니다. 아라비아의 베두인, 투르크인, 메카와 나지드 출신, 메소포타미아 토착 농민 나바티, 동아프리카의 잔지족, 인도에서 건너온 신디족과 잣족 등 다양한 민족과 집단이 공존하였으며, 아랍인은 그 다수 속에서 오히려 소수였습니다. 이곳은 우마이야 시대에 이미 시작된 아랍 문화의 도시화 경향을 이어받아, 유목민적 특성에서 벗어나 보다 정착된 도시 문화로 전환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압바스 시대의 바그다드에서는 아랍어가 행정과 학문을 통합하는 문명과 과학의 언어로 자리 잡았으며, 관료 체계의 아랍어화는 꾸란 다음으로 중요한 문화적 확립 과정으로 평가됩니다.

3. 지성과 지식의 교차로

바그다드는 단순히 제국의 수도가 아니라 지식과 사상의 세계적 교차로였습니다. 칼리프 알-마으문은 이곳에 왕립 학술원 격인 ‘지혜의 집’(Bayt al-Hikmah)을 세우고 번역 사업과 과학 연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천문대가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설치되었고, 번역 운동을 통해 고대 그리스 과학과 철학의 주요 저작들이 아랍어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고전 지식이 아랍 세계를 거쳐 보존되고 확산되는 주요 경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바그다드 중심의 국제적 문화는 비잔틴 제국에도 영향을 미쳐, 황제 테오필로스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바그다드 양식의 궁전을 세우고, 부유한 비잔틴인들이 터번과 카프탄을 착용하는 등 문화적 모방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4. 역사적 평가와 쇠퇴의 그림자

후대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대한 찬사와 달리 바그다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는 바그다드가 이후 정치적 불안과 수도 이전, 그리고 몽골 훌라구의 침공으로 파괴되는 역사적 과정을 예고하는 듯한 평가였습니다. 실제로 압바스 왕조 시기의 바그다드 유적 대부분은 후대의 거주층에 덮여 사라졌습니다. 바그다드는 한때 세계사의 심장이었으나, 결국 제국의 분열과 외세의 침략 속에 몰락하며 찬란했던 문명의 흔적을 땅속에 묻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