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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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기 누난의 경고에서 읽는 한국 공론장의 미래

누난의 경고: 폭력의 늪으로 침잠하는 미국

2026년 5월 2-3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 A15면에는 보수 성향의 원로 칼럼니스트 페기 누난(Peggy Noonan)이 「정치적 폭력에 대응하는 잘못된 방법(How Not to Respond to Political Violence)」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한 시대를 지켜본 관찰자의 깊은 우려가 행간에 묻어났습니다. 미국이 정치적 폭력의 늪으로 빠르게 침잠하고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이 경고는 단지 태평양 건너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 공론장의 가까운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누난이 짚은 사실은 묵직했습니다. 현 트럼프 행정부의 국무·국방장관을 포함한 최소 4명의 내각 요인이 위협의 강도 때문에 군부대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고위 참모, 육군 장관, 그리고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관리도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워싱턴 D.C. 인근 주택에서 평범하게 살던 이들이, 이제는 군이 보호하지 않으면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거론된 사건은 2022년 6월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 대법관 자택 무장 침입, 2025년 9월 보수 활동가 찰리 커크(Charlie Kirk)의 캠퍼스 피살, 그리고 2024년 7월과 9월, 2026년 4월에 발생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세 차례의 암살 시도입니다.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 자리에서도 또 한 번의 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절제(節制)와 간결(terseness)을 잃은 공론장

누난이 더 우려한 것은 폭력 자체보다 폭력 이후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암살 미수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기자들이 “왜 사람들이 당신을 계속 죽이려 한다고 보십니까”, “범인이 당신을 폭군이라 했는데 어떻습니까” 같은 질문을 던지는 풍경을 비판했습니다. 작가 톰 울프(Tom Wolfe)가 말한 ‘정보 강박(information compulsion)’에 사로잡혀 모두가 떠들기를 멈추지 못한다는 진단입니다.

누난은 가상의 장면을 그렸습니다. 만약 1865년 링컨 대통령이 부스의 총탄을 비껴 살아남았더라도, 당대의 노장 기자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는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링컨도 기자회견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절제와 간결의 미덕이 그 시대에는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건 직후에 필요한 것은 4분 내외의 짧은 메시지일 뿐, 가해자의 횡설수설을 분석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루이지 만지오네주의’와 좌절의 토양

누난은 더 깊은 토양을 가리켰습니다. 그는 ‘루이지 만지오네주의(Luigi Mangioneism)’라는 개념을 꺼냈습니다. 시스템이 너무 부패했으니 폭력으로라도 응징해야 한다, 정점에 오른 자들은 당해도 싸다는 정서가 저변에 번지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미국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 거의 모두가 사적 경호를 받고 있는 현실이 그 단적인 증거라고 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입니다.

그리고 그는 청년 문제로 글을 맺었습니다. 금세기 초부터 미국의 젊은이들은 학교와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비관적 메시지를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해수면이 자신들을 삼킬 것이며, 사회는 자신들을 차별할 것이고, 경제에는 자신들의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두뇌가 채 발달하지 않은 22세 청년이 좌절감 속에서 분노의 화살을 누군가에게 겨누어도 정당하다 믿는 토양이 그렇게 자랐다는 진단입니다.

한국 공론장의 거울이 되다

이 진단은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투영됩니다. 우리 공론장 역시 점점 절제를 잃고 있습니다.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을 향한 온라인 위협은 일상이 되었고, 일부 정치인은 실제로 흉기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니어 세대를 향한 혐오 표현은 거리낌 없이 쏟아지고, 청년에게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콘텐츠는 클릭과 조회수로 보상받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폭력 정당화의 논리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라납니다.

시니어의 지혜가 안전망이다

누난은 글의 끝에서 강조점을 바꿔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당신은 파멸하지 않았으며, 이곳에 당신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메시지로 말입니다. 보수의 본령이 바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분노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공동체의 토대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절제, 위엄, 그리고 사회 질서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 지점에서 시니어 세대의 역할이 분명해집니다. 한 시대의 격동을 견뎌온 경험은 흥분한 공론장을 가라앉히는 무게추가 될 수 있습니다. 무절제한 말이 결국 무절제한 행동을 낳는다는 것을, 살아온 세월로 알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의 균형, 감정적 혐오도 무비판적 포용도 아닌 팩트에 기반한 냉철한 분석. 미국의 풍경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도록, 시니어의 경험과 지혜가 공동체의 안전망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