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교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청송대로 올라가는 길 옆 노천극장 높다란 계단 위에서 입학식에 참여할 때, 연단 뒤에 빛이 반사되는 무엇이 보였습니다. 서쪽 건너편에 서 있는 윤동주 시비가 햇빛을 받아 보였던 것입니다.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학생과 하객의 인파를 뚫고 걸었습니다. 백양로를 가로질러 시비 앞에 간신히 섰습니다. 어머니께서 처음 맞춰주신 회색 양복을 어색하게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니 윤동주 시비의 뒤편에 윤동주 학형이 기숙사로 사용하던 핀슨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시 계단에 올라서서 건물 앞에 섰습니다. 입구 오른쪽 기둥에 하얀색 바탕에 ‘연세춘추’라고 세로로 적힌 학보사 현판의 한글 네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옆에 붙어 있는 ‘예비 수습기자 모집’이라는 공고를 봤습니다. 핀슨홀에서 시를 쓰던 윤동주 학형을 상상하며 학보사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그야말로 진짜 기자 시험을 치르더군요. 세로로 눕혀진 A4용지에 하늘색으로 위아래 200자 원고지 틀이 두 개씩 자리 잡은 400자 원고지 뭉치를 내려주는 선배 기자의 시선이 매서웠습니다. 파란색 잉크를 넣은 만년필 ‘영웅’으로 손이 아프도록 원고지를 메웠습니다.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선배들은 맥줏집에 데리고 가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형래야, 너는 네 원고지가 무거워서 합격한 거야!” 선배의 합격 평이 맘에 들었습니다. 예비 수습기자로 발령이 났고 우리를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미션스쿨이었기에 쉽게 이해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47기 예수’가 되어 ‘글쓰기 형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수습기자-정기자-부장까지. 학생 이자 기자였습니다.
그리고 44년이 지난 어느 날, 시니어 인턴기자 면접을 보는 자리에 면접관으로 제가 앉아 있습니다. 편집장이랍니다. 신문을 창간하면서 제가 그 자리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기자가 되고 싶어 핀슨홀 앞을 서성이던 그때의 설레던 감정을 다시 심장 깊이 주입해 봅니다. 다시 그 제자리에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