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02일
김형래_16X9_2014-08-10_14. 7. 24. - 6_800

늘 자전거로 함께 통학하던 친구네 본가는 도시에서 30리나 떨어진 시골에 있었습니다. 도시로 유학을 와서 누나들과 자취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되어서 주말에 시골 본가에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생업을 꾸리는 농부들의 고된 일상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유독 눈에 띄었던 것은 친구 어머니께서 닭 모이를 주는 광경이었습니다.

소쿠리를 옆에 끼고 무논에 비료 주듯 잘게 간 옥수숫가루를 휘 휙 뿌려가면서 먹이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닭들은 죽어라 날개를 퍼덕이며 친구 어머니를 쫓았고, 유독 가까이에서 큰 날개를 퍼덕이며 독식하려는 수탉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뒤를 쫓는 닭들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신호처럼 날개를 커다랗게 펼치는 모습이 거대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몇 주가 지났는데, 친구가 또 시골 본가에 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개울가에서 천렵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는 한창 더운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시골에 도착하니 리어카에 가마솥이며 장작이며 매운탕 끓일 양념까지 그득히 실렸습니다. 그리고 털까지 깨끗이 뽑힌 커다란 토종닭이 한 마리 있었습니다.

“얘가 그때 너 왔을 때, 그렇게 따라다니던 그 수탉이란다. 다른 놈들은 얼마나 날쌘지 잡을 수가 없어서, 가까이 나만 따라다니던 그놈을 잡은 거야. 맛있게 해 먹거라”

친구 어머니께서는 내가 그토록 신기하게 보았던 수탉의 근황을 알려주셨습니다. 수탉은 매일 모이를 주는 친구 어머니에게 호의를 가졌던 것이 분명했고, 결국 제일 가까이에서 희생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아마도 그 수탉은 “우리 어머니가 나를 잡으려 하는 것은 모이를 더 주려고 하는 것이지, 나를 절대로 식삿거리로 생각하지 않으실 거야. 안심하고 잡히자!”라고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 천렵에 희생된 수탉은 ‘귀납법(歸納法, Induction)의 오류에 빠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71년~1776년)이 이미 18세기에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귀납법을 경고했습니다.

귀납법에 취약한 것은 그 수탉뿐만 아니라 우리도 해당합니다. 개별적으로 관찰한 사실이나 원리를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난 확실한 사실이나 원리로 결론짓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빠져들고 헤어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귀신도 모른다는 주식의 향방을 맞추는 한 리딩방의 운영자는 회원 수가 1만 명이 넘자, 본인이 계획했던 작전에 돌입합니다. 회원 5천 명에게는 다음 주에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투자를 부추기고, 5천 명에게는 다음 주에 주가가 내릴 것이라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경계심을 키우게 합니다. 그런데 다음 주 주가가 내립니다.

그러면 주가가 내일 것으로 예상하는 이메일을 보낸 사람 중에 2,500명에게는 다가오는 다음 주에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이메일을 보내고, 나머지 2,500명에게는 주가가 내릴 것이라는 이메일을 보냅니다. 다가오는 다음 주에 주가가 내렸습니다. 그러면 맞게 예측한 2,500명을 다시 반으로 나누어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쪽으로 절반을, 절반은 주가가 내일 것으로 예상하는 이메일을 각각 보냅니다.

7주가 지나니 연속으로 주가 전망을 맞춘 이메일을 보낸 이들은 39명으로 압축이 됩니다. 이들에게는 그 어렵다는 주가 전망을 7주 연속으로 맞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예측력을 가진 사람으로 부각됩니다. 39명에게 그는 영웅이고 예언가와 같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 됩니다. 팬덤이 생기고 그중에 몇몇은 자신의 전 재산을 맡아 관리해달라고 매달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돈까지 빌려와서 맡아 달라고 애원합니다. 이제 7주간 도피를 철저히 준비한 리딩방 운영자는 찾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 뿐입니까? 열 번 내리 맞춘 점쟁이의 열한 번째 점궤도, 선고형량을 내리 여덟 번 맞춘 변호사의 아홉 번째 예상도, 다섯 해 장마시기를 맞춘 기상예보관이 여섯 해 장마 예보는 반드시 맞는다고 생각하는 게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속임수에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도 속입니다. 마라톤을 10차례 연속 완주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난가을 전국적으로 유명한 가을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친구는 그 대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우리 친구들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11번째 마라톤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주소 없는 먼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그 친구 자신도 남들보다 더 건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오래 살 거라고 여겼지만 확신은 무너졌습니다. 10차례 연속 출전으로 11번째 출전을 의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단 한 번의 반대되는 경험은 앞서 수천 번 입증된 이론을 뒤집기에 충분합니다. 이처럼 귀납적인 생각은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납적인 생각을 늘 적용합니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토목공학이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하리라 믿고, 버스가 회전할 때 넘어지지 않고 잘 지나갈 것이라고 믿고, 오늘 하루 감사한다는 기도를 올리면서 잠이 들 때, 내일 역시 내 심장을 뛸 것이라고 여깁니다. 사실 그런 확실들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귀납법은 필요합니다.

귀납법은 확실히 유혹적입니다. “우리 국민은 언제나 해내 왔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험난한 도전은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은 대한민국을 이끈 힘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마치 미래에도 영원무궁하게 발전하리라는 암시로 받아들이는 것은 심각한 생각의 오류입니다. 모든 확신은 언제나 일시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확신은 언제나 일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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