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世 式希
始仕麗朝開府儀同三司事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新羅朝慶州淸道雲門寺近處軍士養兵新羅朝廷守護中敬順王而麗朝附歸後神劒擊滅之功三重大匡太師溟州事審官高麗統一殿功臣閣配享始仕麗朝官開府議 同三司事三韓壁上功臣太師 三重大 太師
◎ 김식희(式希), 강릉김씨 6세손으로 아버지 영진(英珍)의 독자(獨子)

강릉 김씨 6세 김식희 장군 일대기
김식희(金式希) 장군은 강릉 김씨 시조이신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6세손이시자 대내마(大內麻) 영진(英珍) 공의 장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 말기, 국정이 극도로 혼란하던 시기에 태어나 격변하는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셨습니다.
1. 신라 말의 혼란 속에서 군사 양성
서기 918년(경명왕 2년), 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해가던 때, 신라에서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을 침공하고 각지에서 크고 작은 초적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국난 속에서 김식희 장군은 명주(溟州, 현 강릉)에서 왕성(王城, 신라의 서라벌)으로 파견되시어, 대장군 손긍훈(孫兢訓)과 함께 화랑의 군사 훈련장이었던 대작갑사(大鵲甲寺)에 들어가 수많은 군사를 양성하셨습니다. 이는 쇠락해가는 신라 조정을 수호하기 위한 충성심의 발로였습니다.
2. 고려 건국과 후백제 격파의 공
군사를 양성하며 신라를 지키던 중, 견훤이 경주의 궁성까지 침범하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장군께서는 과감하게 고려의 왕건에게 견훤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셨습니다. 이후 왕건의 휘하에서 활약하시며 황산성(黃山城)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셨습니다. 이 승리는 후삼국 통일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3. 고려 통일 공신으로 봉작
김식희 장군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신 공로를 인정받아 개국부의삼사사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開國府儀三事司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로 봉작되셨습니다. 이 관직은 고려 초기에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직함으로, 장군께서 고려 건국과 통일에 얼마나 큰 공을 세우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고향인 명주(溟州) 지역의 지방관인 사심관(事審官)을 겸하여 명주 지역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셨습니다.
4. 사후 추앙

장군의 영정(影幀)은 현재 경상북도 청도 운문사(雲門寺) 조영당에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9일에 제례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후손들과 지역민들이 장군의 숭고한 정신과 공훈을 기리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장군께서는 고려 통일 후 공신각(功臣閣)에 배향되시어, 고려 통일의 대공신으로 영원히 추앙받고 계십니다.
[삼중대광: 고려시대 정1품 문관의 품계.]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복위하여 개정할 때 신설하였다. 이전까지는 종1품계가 최고등급이었는데 이 때 처음으로 정1품계가 설치된 것이다.
삼중대광은 중국으로부터 문산계제를 도입하기 전에 이미 고려왕조가 채택하고 있던 초기의 관계(官階)에서도 전체 16등급 중 제1위의 위치에 있었다.이와 같은 고려 나름의 초기 관계 가운데 일부의 계호(階號)가 이 때에 이르러 중국식 문산계제 내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되어야 할 점이다.삼중대광은 얼마 뒤 그 위에 ‘벽상삼한(壁上三韓)’이 가호(加號)되어 벽상삼한삼중대광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없애고 이전대로 부르기도 하여 여러 차례의 변화과정을 거쳤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삼중대광(三重大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