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9월 13일
9-12-2200

선이슬람 시대는 시와 수사학이 아랍 사회의 문화, 정치, 그리고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대는 정착민 사회(hadari)와 유목민 사회(badawi) 간의 이중성 속에서 부족 간의 분쟁과 연대가 공존하였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언어는 단순한 소통 도구를 넘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고급 아랍어(‘arabiyyah)의 부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낙타 사육으로 인한 장거리 무역과 이동성 증가는 다양한 북부 아라비아 방언 사용자들 사이의 소통 필요성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5세기 이전에는 ‘아라비야(‘arabiyyah)’라는 통일된 북부 언어의 고급 형태가 등장하였고, 이는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신탁을 내리고 시를 낭송하는 데 사용되는 신비한 언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고급 아랍어는 다양한 부족을 아우르는 단일 문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언어가 혼합되고 유목적인 민족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기반을 제공하였습니다.

시인(sha’ir)은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예언자나 샤먼과 유사한 지위를 가진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의 언어적 능력은 추종자를 모으는 힘이 되었으며, 그들의 시는 선이슬람 시대 아랍 생활, 신념, 사건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서 ‘시의 고고학’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시와 수사학은 집단적 연대를 형성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븐 할둔은 “수사학이 충분한 사람들을 설득하고 집단적 연대(’asabiyyah)를 형성한다면 그것 자체가 진실의 증거가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즉, 단어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동시에 분열시키는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6세기의 임루 알 카이스(Imru’ al-Qays)가 있으며, 그는 아랍 시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부족 갈등 속에서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고, 유목민적 개별주의를 드러낸 그의 시는 아랍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또한 아샤 카이스(A’sha Qays)와 같은 시인들은 시적 묘사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시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언자(kahin) 역시 선이슬람 사회에서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으며, 야생에서의 사색과 초자연적 통찰력을 통해 운율 있는 고상한 연설을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꾸란의 초기 계시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습니다. 무함마드의 초기 청중에게 꾸란의 계시는 카힌의 언어와 비슷하게 들렸으며, 무함마드 자신도 일시적으로 이를 우려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예언자직 이후에는 카힌의 직위가 없다”고 선언하며, 기존의 카힌 전통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종교적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선이슬람 시대는 구전 문화에서 기록 문화로의 전환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회는 본래 시인과 예언자의 말이 지배하는 구전적 성격을 띠었으나, 꾸란의 계시와 함께 글쓰기의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암송과 쓰기는 계시의 시작부터 함께 이어졌으며, 쓰기는 암송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영감을 받은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선이슬람 시대의 시와 수사학은 예술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 통합, 정치적 설득, 종교적 권위의 기반이 되는 핵심 요소였습니다. 시인과 예언자들은 언어의 힘을 통해 부족 사회의 가치를 전달하고, 갈등과 분열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주역으로 자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