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쓸모의 끝이 아니라, 배운 것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시간입니다
미국 뉴욕타임스 국제판은 2026년 9월 16일 자 과학면에서 한 은퇴 수학자와 10대 제자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주인공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2004년 은퇴한 위상수학자 조안 버먼(Joan Birman) 박사와, 같은 동네에 살던 고등학생 바수다 바라트람(Vasudha Bharathram)입니다. 두 사람은 글래스고대학교의 타라 브렌들(Tara Brendle) 교수와 힘을 합쳐 약 100년 동안 풀리지 않던 수학 난제를 해결했고, 지난 7월 그 결과를 논문으로 공개했습니다.
이야기는 2019년 여름의 이메일 한 통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92세였던 버먼 박사는 수학을 더 깊이 배우고 싶다는 한 고등학생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은퇴 뒤에도 이런 요청은 간간이 이어졌지만 박사는 선뜻 나설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2년 전에 사별한 그는 세 자녀를 키운 교외의 집을 정리하고 대학 연구실과 가까운 아파트로 옮겨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는 누가 시켜서 쓴 것이 아닌 진심이 읽혔고, 며칠 뒤 그는 만나 보겠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 수준의 추상대수학 교재를 먼저 구해 읽어 오라고 일렀습니다.
그해 7월, 막 15세가 된 바라트람이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아파트 로비에 나타났습니다. 세 살 때 인도로 갔다가 8학년 때 뉴욕으로 돌아온 학생이었습니다. 박사는 자신의 전공인 위상수학(topology)이 고정된 좌표에 묶이지 않고 늘어나고 휘어지는 도형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설명했고, 머리를 땋은 모양처럼 여러 가닥이 엇갈린 브레이드(braid)를 연필로 그려 보였습니다. 며칠 뒤 학생은 풀이 과정을 빼곡히 적은 노트 여러 장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습니다. 어려운 문제에 겁 없이 덤빈 대담함도 놀라웠지만, 박사가 더 눈여겨본 것은 남다른 길로 정답에 이르는 독창성이었습니다. 글씨가 엉망이라는 스승의 지적을 받자 학생은 다음부터 답을 타자로 쳐 왔습니다.
버먼 박사 자신도 늦게 핀 학자였습니다. 세 자녀를 키우며 시간제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는 34세에 야간 수학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1968년 박사학위를 마쳤을 때는 41세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거절당해도 문제 삼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가 택한 브레이드 연구는 당시 침체된 분야로 여겨졌지만, 그는 이를 매듭 이론을 비롯한 여러 영역과 연결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1984년 본 존스(Vaughan Jones)가 새로운 다항식을 발견했을 때 그 쓰임새를 확인하러 찾아간 곳도 버먼 박사의 연구실이었고, 존스는 훗날 필즈상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도전한 문제는 부라우 표현(Burau representation)의 충실성
(faithfulness)입니다. 브레이드라는 도형을 다항식의 묶음으로 옮겨 적을 때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가닥이 3개 이하이면 정보가 온전히 보존되고 5개 이상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었지만, 4가닥의 경우는 박사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오랫동안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박사는 교재를 함께 읽던 초기부터 이 문제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직후 제자에게 이미 확립된 3가닥 사례부터 다시 살펴보라고 권했습니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박사는 길에서 쓰러졌고 심장박동기 수술도 받았지만, 화상 수업과 공원 벤치에서의 만남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초기 작업을 검토한 밴더빌트대학교의 댄 마갈릿(Dan Margalit) 교수는 성공을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격려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박사는 자신의 옛 박사과정 제자인 브렌들 교수를 불러들였고, 브렌들 교수는 도식의 오류를 곧바로 짚어 내며 세 번째 동료가 되었습니다. 돌파구는 지난겨울에 열렸습니다. 4가닥 브레이드를 5가닥의 세계 속에서 다시 해석하자, 정보 손실을 의심하게 만들던 다항식 항들의 상쇄가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브렌들 교수는 이를 수학 인생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그사이 바라트람은 스승의 추천서를 들고 단 한 곳 지원한 프린스턴대학교에 진학했고, 지금은 대학원 첫해를 시작하며 4차원 공간의 매듭으로 연구를 넓히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이야기에서 세 가지를 읽습니다.
첫째, 성취는 요행이 아니라 축적에서 나옵니다. 백 년 난제가 풀린 것은 하루아침의 영감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이 수십 년 품어 온 질문과 제자가 7년 동안 이어 간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둘째, 가르침에는 엄격함이 있어야 합니다. 박사는 어린 학생을 어린아이로 대하지 않고, 어려운 교재를 주며 악필을 지적했고, 학생은 그 기준에 맞추려 애쓰며 자랐습니다.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곧 배려라고 여기는 요즘의 풍조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셋째, 은퇴는 물러남이 아닙니다. 박사는 대학까지 17달러(약 2만 4천 원, 1달러 1,400원 기준)의 택시비를 들여서라도 수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에 살기를 고집했고, 동료 학자는 97세인 그에게 수학이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 사례를 모든 시니어가 따라야 할 표준으로 삼을 일은 아닙니다. 건강과 형편은 저마다 다르고, 이번 논문도 앞으로 학계의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평생 쌓은 경험과 기준은 다음 세대에게 건넬 때 비로소 제값을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제자로 받아 함께 일하던 딸을 잃은 뒤 오랫동안 어린 제자 받기를 사양했던 박사가 다시 마음을 연 데에는 낯선 소녀의 진심 어린 편지 한 통이 있었습니다.
우리 시니어에게도 그런 편지가 올 수 있습니다. 그때 귀찮다고 밀어내지 않고 생각해 보겠다고 답할 수 있는 준비가 품격 있는 노년의 출발점이라고 필자는 믿습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