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이슬람 시대는 부족 간의 분쟁과 통일 시도가 아랍 사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드러난 시기였습니다. 이 시대는 정착민 사회(hadari)와 유목민 사회(badawi) 간의 이중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두 사회는 때로 상호 이익을 얻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서로를 구별하고 대립하는 긴장 구조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단결의 희망과 분열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고, 부족 간 집단적 연대(’asabiyyah)는 중요한 결속의 요소였으나 동시에 끊임없는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부족 간의 분쟁
선이슬람 시대의 아랍 부족들은 잦은 전쟁과 대립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아랍의 날들(Ayyam al-Arab)”이라 불리며, 부족 간 끊임없는 혈투로 기록되었습니다. 유목 사회의 기본 제도는 습격(ghazw), 곧 정복이나 쿠데타였고, 이는 타 부족의 가축을 약탈하는 것을 반복적인 관습으로 고착시켰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수스 전쟁(War of Basus)과 다히스 전쟁(War of Dahis)은 장기간 이어진 유혈 충돌로, 끝없는 복수와 적대의 악순환을 잘 보여줍니다. 한 기록에서는 이러한 부족 전쟁이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전멸시킨다”고 묘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븐 할둔(Ibn Khaldun)은 이러한 상황을 지적하며, 유목민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문명이 항상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고 논평하였습니다.
통일을 향한 시도들
그러나 이러한 분열 속에서도 아랍 사회는 나름의 통합을 모색하였습니다.
첫째, 남부 아라비아에서는 신권적 통일 모델이 등장하였습니다. 사바(Saba)는 주신(主神) 일마카(Ilmaqah) 숭배를 중심으로 여러 하위 부족(sha’bs)을 결속시켰고, 구성원들은 마립(Marib)에서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순례를 통해 연맹체의 일체감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훗날 이슬람의 종교적·정치적 통합 사상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문화적 측면에서는 고급 아랍어(’arabiyyah)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낙타의 활용으로 장거리 무역이 활발해지자, 다양한 북부 방언 사용자들 사이에서 소통 가능한 언어가 발전하였고, 그 정제된 형태가 바로 ’arabiyyah였습니다. 이는 일상 언어가 아니라 신탁을 전하거나 시를 낭송할 때 사용되는 신비적 언어였으며, 이를 다룰 줄 아는 샤이르(sha’ir, 시인·예언자·샤먼)는 부족을 초월해 사람들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이 언어와 시는 단일 문화적 기반을 마련하며 통합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셋째, 시인 임루 알 카이스(Imru’ al-Qays)의 사례가 주목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신 두 알 칼라사(Dhu ’l-Khalasah)에게 신탁을 구했으나, 반복되는 부정적 응답에 화살을 꺾어버리며 전통 종교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이는 개별주의적 성향과 전통적 권위에 대한 반발을 드러내는 사례였습니다. 그의 삶은 부족 간의 갈등과 개인적 복수 속에서 전개되었고, 그의 시는 방랑자적 삶과 절대적 개별주의를 반영하였습니다. 그는 아랍 시의 선구자로 평가되며, 아랍 문학 전통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넷째, 킨다(Kindah) 왕국은 정치적 통합을 향한 또 다른 시도였습니다. 킨다는 카르야트 닷 카흘(Qaryat Dhat Kahl)을 중심지로 삼아 여러 부족을 결집하려 하였으며, 이는 훗날 무함마드가 부족들을 하나로 묶고자 했던 방식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종합적 의미
결국 선이슬람 시대는 분열과 통합이라는 상반된 흐름이 동시에 존재한 시기였습니다. 부족 전쟁과 끊임없는 복수로 사회는 불안정했지만, 남부의 신권 정치 체제, 언어와 시를 통한 문화적 연대, 그리고 초기 정치적 통합 시도는 훗날 이슬람 공동체라는 거대한 통합체로 이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임루 알 카이스와 같은 인물의 삶과 시는 당시의 혼란과 갈등, 그리고 개인주의적 성향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선이슬람 아랍 사회의 복잡한 풍경을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