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증상을 검색하고 스스로 진단
손녀가 “나 우울증이야”라고 말할 때
미국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2026년 8월 25일 자 오피니언면에 심리치료 전문용어(therapy-speak)의 확산을 다룬 정신과 임상의의 글을 실었습니다. 필자가 진료 현장에서 관찰한 변화는 이렇습니다. 과거의 젊은 환자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듣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상담실을 찾는 10대 소녀와 젊은 여성들은 자기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강박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같은 병명을 먼저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 병명을 얻은 경로는 병원이 아니었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증상을 검색하고, 짧은 영상 플랫폼에서 자가 진단 퀴즈를 풀고, 친구들과 서로의 상태를 대조해 본 결과였습니다. 학교 성적이나 가정 형편, 성향과도 무관하게 이 흐름은 폭넓게 퍼져 있다고 필자는 적었습니다.
왜 병명이 위로가 되는가
이 대목에서 임상의의 관찰은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젊은 환자들이 말하는 진단명은 반드시 의학적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개인적 고통을 담아 둘 그릇, 즉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서사를 찾으려는 대처 기제에 가깝다는 분석입니다.
필자가 소개한 사례들은 구체적입니다. 어떤 소녀는 우울증이라고 말해야 어른이 자신을 신경 써 줄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른 소녀는 ADHD라는 이름표를 통해 활발한 온라인 공동체에 소속되면서 외로움을 덜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젊은 여성들은 가까운 사람을 향한 분노와 그 감정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진짜 원인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자기 뇌의 결함 탓으로 돌리는 편이 덜 무서웠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를 두고, 심리치료 전문용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물론 자가 진단이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도 있었다고 필자는 덧붙였습니다. 다만 상당수는 불편한 감정과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타협한 결과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밝히기도 하고 가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이 현상을 나약함이나 자기 탐닉으로 몰아붙이는 태도의 위험입니다. 필자는 정신의학의 진단 범주가 다른 의학 분야보다 유연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병명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겪는 사람은 둘도 없기에, 임상에서는 병명보다 사람을 먼저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도 분명히 밝힙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진단 용어를 앞세우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는 자신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느끼고 전문가에게 맡긴 채 물러서게 됩니다. 젊은이가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도 중간에 끊길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인용한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말처럼, 어떤 이름은 사물의 한 면을 비추면서 다른 면을 가려 버립니다.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
이 이야기는 결코 남의 나라 사정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짧은 영상과 검색 몇 번으로 자신의 상태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손주 세대가 식탁에서 낯선 심리학 용어를 꺼낼 때, 시니어 세대가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두 갈래입니다. 큰일이 났다며 지나치게 놀라거나, 다 괜찮으니 마음 굳게 먹으라며 서둘러 덮으려 하는 것입니다.
필자의 지적대로 두 반응 모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과잉 반응은 문제의 초점을 아이의 고통에서 어른의 두려움으로 옮겨 놓습니다. 성급한 안심시키기는 아이의 고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대신 필자가 권하는 것은 작은 번역의 행동입니다. ADHD라고 말하는 아이는 머릿속이 산만하고 감당하기 벅차며 자신이 엉망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말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불안하다는 말은 마음이 쓰이고 자신이 없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단어에 놀라기 전에, 그 아이가 왜 절망스럽고 외로운지를 먼저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반박하기 위한 되묻기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되묻기입니다.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심각하게
저는 이 대목에서 시니어 세대가 가진 자산을 봅니다. 우리 세대는 마음의 고통을 말할 언어가 부족했던 시절을 통과해 왔습니다. 참는 것이 미덕이었고, 병원 문턱을 넘는 일은 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결핍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몸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요즘 젊은 세대가 감정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름표가 성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진단은 출발선이지 종착지가 아닙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할 언어를 갖는 것과, 그 언어 뒤에 숨어 책임과 관계로부터 물러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지원과 요구는 함께 가야 합니다. 아이의 고통을 진지하게 듣되,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사실도 조용히 일러 주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오랜 세월을 살아 낸 시니어입니다. 유행어의 표면에 흔들리지 않고, 그 아래 흐르는 진짜 감정을 알아보는 눈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손주가 낯선 용어를 꺼낼 때 놀라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조용히 되묻는 그 한마디가, 어쩌면 어떤 처방보다 먼저 필요한 첫걸음일 것입니다.
편집자 注 본 칼럼은 뉴욕타임스 2026년 8월 25일 자 오피니언면에 실린 심리치료 전문용어 관련 기고를 참고해 재구성한 것으로, 원문의 직접 인용 없이 요지를 정리했습니다. 원문에 언급된 Z세대의 자가 진단 비율(약 50퍼센트) 수치는 원저자가 일부 통계로만 밝힌 것으로 출처 기관과 조사 시점이 특정되지 않아 본문에서 제외했으며, 인용 시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본 칼럼에는 외화 표기 금액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