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이후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은 한 언론인이 있습니다.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El País)가 지난 8월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실은 이 칼럼니스트의 카라카스 방문기는, 재난과 궁핍이 뒤섞인 나라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그런데 그 풍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무너진 건물도, 텅 빈 상점도 아니었습니다. 거리를 메운 얼굴 대부분이 백발의 시니어였다는 사실입니다. 청년이 떠난 자리를 시니어가 지키고 있는 나라, 베네수엘라의 오늘은 우리에게도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
지진이 드러낸 나라의 민낯
지난 6월 24일 저녁, 베네수엘라 서북부 해안 지역에서는 규모 7.2와 7.5의 지진이 30여 초 간격으로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수도 카라카스와 인근 라구아이라(La Guaira) 일대가 특히 큰 피해를 입어 다수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국제 구호기구와 외신 집계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사망자는 6,500명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되며, 참사 발생 두 달이 다 되도록 잔해 속에서 실종자를 찾는 수색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가 전한 라구아이라의 풍경은 참혹합니다. 해수욕장은 텅 비었고, 무너진 건물 주변에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난은 이미 취약했던 일상 위에 겹쳐졌습니다. 수도 한복판에서조차 수돗물은 일주일에 두 번만 공급되고, 정전은 예고 없이 되풀이됩니다. 공식 통화는 볼리바르이지만 2019년 이후 사실상 달러 경제가 자리를 잡아, 상점 가격표는 대부분 달러로 매겨져 있습니다. 거스름돈으로 줄 동전이 없어 승객이 요금을 웃돈 채로 내는 대중교통 풍경도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인구 보너스를 삼켜버린 이주의 물결
낡은 미니버스에 오른 칼럼니스트는 승객 대다수가 시니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대중적인 술집에서도, 도심 거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3년 동안 베네수엘라는 지도자의 사망과 권위주의 체제의 공고화, 초인플레이션, 대규모 난민 발생, 만성적 정전과 식량난을 차례로 겪어 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올해 1월 3일에는 미국의 군사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가 나포되어 국외로 이송되고,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 작전의 국제법적 정당성을 둘러싸고는 지지와 비판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어,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입니다.
이러한 연쇄적 위기 속에서 8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그것도 대부분 청장년층이 해외로 떠났습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는 인구 배당(Demographic Dividend), 즉 두터운 생산연령인구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되는 인구 구조상의 이점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노동 연령대가 통째로 빠져나가면서, 아이들은 부모의 보살핌을 잃었고 시니어들은 곁을 지켜 줄 자녀를 잃었습니다. 빈부 격차 역시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카라카스 일부 지역에서는 차이 라테 한 잔이 7달러(약 9,700원)에 팔리는 반면, 상당수 국민의 월수입은 최대 50달러(약 6만 9,000원)에 그친다고 칼럼니스트는 전합니다. (환율은 2026년 8월 하순 시장환율인 1달러=약 1,380원을 기준으로 환산하였습니다.)
베네수엘라의 몰락은 전쟁에 가까운 정치적 격변과 극단적 실정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저출산이 근본 원인인 한국의 고령화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두 나라가 공유하는 본질은 같습니다. 생산연령인구가 어떤 이유로든 빠르게 줄어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남겨진 세대, 즉 어린이와 시니어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입니다. 베네수엘라는 그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줄 뿐입니다.
한국 사회가 새겨야 할 지점은 분명합니다. 화폐 가치와 재정 건전성이 무너지면 연금과 의료보험 같은 사회안전망은 하루아침에 종잇조각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안정과 법치, 그리고 절제된 재정 운용이야말로 시니어의 노후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동시에 지켜내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프레임 대신, 구조적 원인을 직시하고 제도를 미리 정비하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질서와 존엄을 지키는 힘
그럼에도 칼럼니스트는 카라카스 사람들에게서 다정함과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발견합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시니어들의 모습에서, 그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는 공동체의 저력을 읽어냅니다. 이는 시니어가 단순한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의 존엄을 지탱하는 사회적 자산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베네수엘라의 비극이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전통적 질서와 가족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적 지혜와, 재정·제도적 지속가능성을 냉철하게 계산하는 합리적 기준이 함께 갈 때에만, 어떤 위기 속에서도 시니어와 다음 세대가 함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