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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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의 섬광을 딛고 일어선 재일한국인 야구 전설 장훈 선생, 86세로 영면하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의 주인공 장훈(張勲 チャン・フン, 張本 勲 はりもと いさお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의 대기록 보유 선수들로 구성된 엘리트 단체인 골든 플레이어스 클럽(Golden Players Club)은 장훈 선생이 지난 수요일 별세했다고 발표했으나, 구체적인 사인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를 요약하는 숫자는 단연 3,085라는 안타 기록입니다. 1980년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3,000안타 고지를 밟았고, 은퇴 시점의 최종 기록인 3,085안타는 지금까지도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 안타로 남아 있습니다. 23년의 선수 생활 동안 504개의 홈런을 때렸고, 2,752경기에 출전했으며, 올스타에는 열여덟 차례 선정되었습니다. ‘타격 기계’라는 별명은 과장된 수식이 아니라 기록이 스스로 붙여 준 이름이었습니다. 199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숫자 뒤에 놓인 출발점은 참혹했습니다. 장훈 선생은 1940년 히로시마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 오른손에 심각한 화상을 입어 손의 운동 능력을 대부분 잃었습니다. 운동선수에게 손은 생명과 같은 도구입니다. 그 도구의 절반을 잃은 소년이 훗날 일본 야구사에서 가장 정교한 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결핍이 곧 운명의 선고는 아니라는 점을 웅변합니다. 그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왼손타자로 야구를 배웠습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그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산 뒤편에 있어 폭발의 직접적인 충격파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훗날 증언했습니다. 폭심지 근처에 있던 누나는 심각한 화상을 입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훈 선생은 그 며칠 동안 이어진 누나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평생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야구를 시작한 소년은 중학교 시절 분명한 목표 하나를 품습니다.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편안한 삶을 드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기 위해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동기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23년 동안 그라운드에 세운 힘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바로 그 소박한 효심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빠르게 증명했습니다.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에 입단해 115안타를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이듬해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습니다. 1961년에는 첫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선수 생활 중 유일하게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본 1962년에는 처음으로 30홈런 시즌을 만들어 냈습니다.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통산 868홈런의 오 사다하루(왕정치) 선수와 한솥밥을 먹었고, 1980년 지금의 지바 롯데 마린스로 옮겨 통산 3,000안타와 500홈런을 완성한 뒤 1981년 방망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은퇴 후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름을 떨친 인기 야구 해설가로 제2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반전과 핵군축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 계기는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젊은 세대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TBS 방송 인터뷰 등을 통해 섬광과 폭발, 그리고 의식을 잃었던 그날의 기억을 반복해서 증언했습니다.

그는 “야구 선수로서 나는 언젠가 원폭 후유증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항상 걱정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전성기의 기록 뒤에는 자신의 몸을 믿지 못하는 불안이 늘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만년의 그는 피폭 생존자들의 고령화를 자주 우려했고, ‘살아 있는 마지막 전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계속 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의 증언은 특정한 정치적 주장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섯 살 아이가 두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사실의 기록이었습니다. 역사의 해석은 세대마다 갈릴 수 있으나, 겪은 사람이 남긴 목격담은 해석 이전의 자산입니다. 그 자산이 사라지면 후대는 판단할 재료조차 잃게 됩니다. 증언자가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지금, 우리가 안타까워해야 할 것은 한 유명인의 부고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기억이 통째로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훈 선생의 생애는 우리 시니어 세대에게 두 가지를 묻습니다. 첫째, 조건이 나쁘다는 이유로 스스로 접어 둔 일은 없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는 오른손을 잃은 채 왼손으로 3,085개의 안타를 쳤습니다. 둘째,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건네고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전쟁과 가난, 산업화와 외환위기를 통과한 우리 세대 역시 저마다 증언자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경험은 한 세대가 끝나는 순간 함께 끝납니다.

한 소년이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방망이를 들었고, 그 성실이 23년 동안 쌓여 누구도 넘지 못한 기록이 되었으며, 노년의 그는 그 이름값을 기억을 전하는 일에 썼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