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31일
10-31-1600#159

— 용서와 거리 사이에서

세상에는 고칠 수 있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애써 붙잡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관계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이 사실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부모는 여전히 마음의 버팀목이지만, 또 누군가에게 부모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부모와의 단절이라는 주제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금기시됩니다. “그래도 부모는 부모지 않느냐”는 말이 너무 쉽게 입에 오르지만, 정작 그 말 뒤에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무지가 숨어 있기도 합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혹은 감옥

우리는 어려서부터 가족을 절대적인 가치로 배우며 자랍니다. “효(孝)”라는 단어는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도덕적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반드시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이라는 전제는 이제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었습니다.

폭언과 통제,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자란 아이에게 가족은 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으로 남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효도’라는 이름 아래 다시 그 관계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단절은 때로 도망이 아니라 ‘생존’의 형태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상처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 두기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심리학에서는 “가족 내 단절은 회복의 과정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불효나 냉정함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한 사람의 선택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부모님이 아프시다는데 그래도 봐야 하지 않느냐”는 말, “자식이라면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옳은 말이지만,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관계의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월이 쌓이면서 그 상처가 더 단단히 굳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랑은 그저 일정한 거리에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로를 더 아프게 한다면, 그 사랑은 더 이상 ‘함께’가 아니라 ‘분리’ 속에서만 숨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관계의 아이러니이자, 삶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중·장년층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이런 갈등을 경험합니다. 부모 세대는 여전히 “자식은 내 소유”라는 무의식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식 세대는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인격체로 살고자 합니다. 그 간극이 때로는 한 세대 전체의 심리적 단절로 이어집니다.

 “그래도 가족이니까”라는 말의 폭력성

“그래도 가족이니까 용서해야지.” 이 말은 언뜻 따뜻하게 들리지만, 그 안에는 강요가 숨어 있습니다. 인간의 관계는 피로 이어졌다고 해서 모두 회복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인간의 고귀한 덕목이지만, 강요된 용서는 또 다른 상처가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잊지 않음’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미움조차 스스로를 보호하는 감정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이 주제는 더욱 복잡하게 다가옵니다. 자신이 부모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이 내게 냉정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지만, 돌아보면 자신 또한 젊은 시절 자식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이 듦은 관계의 재정의

나이가 들수록 관계의 본질은 ‘소유’가 아니라 ‘존중’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는 성숙이 필요합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화해’보다 ‘이해’가 먼저라고 말합니다. 이해가 없는 화해는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만나야 한다면, 과거의 서운함을 덮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가족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 있음’이 아니라 ‘함께 있어도 괜찮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억지로 붙어 있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화해일 때가 많습니다.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세대는 ‘효’를 의무로 배웠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그것이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를 돌보는 일이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라면 가장 아름답지만, 자신을 희생해야만 가능한 돌봄이라면 그것은 폭력에 가깝습니다.

시니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당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면, 그것이 반드시 불효의 표시라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그 아이가 당신을 미워하기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 입장에서도, “나는 부모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떤 사랑은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남아도 괜찮습니다. 세상에는 ‘화해 없이도 완성되는 평화’가 분명 존재합니다.

관계의 끝에서 다시 배우는 삶

삶의 후반부에 우리는 ‘남은 관계’를 정리하는 시기를 맞습니다. 친구, 배우자, 형제자매,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까지. 그 모든 관계를 통해 남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부모와의 단절을 경험한 사람에게 그 고통은 오래 남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세우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남편의 이야기처럼, 어떤 이는 단절 속에서 오히려 평화를 찾습니다.

그 평화는 화해보다 깊고, 용서보다 조용한 것입니다. 서로를 더 이상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멀리 서 있는 평화, 그것이 어쩌면 인간관계의 마지막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부모니까, 자식이니까”라는 말로 관계를 규정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대신 우리는 이제 묻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이 ‘예’라면 함께 있고, ‘아니오’라면 멀리 서 있어도 괜찮습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상대의 평화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나이 든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마지막 사랑의 형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