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 20일
08-25-0600-1024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 2026년 8월 21일 자 오피니언 지면에는 영국 노동조합회의(TUC) 폴 노박(Paul Nowak) 사무총장의 기고문이 실렸습니다. 영국 정부가 추진 중인 착취적 제로 시간 계약(zero-hours contracts) 금지 법안을 두고 기업 로비 단체들이 내세운 비용 추산이 부풀려졌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제로 시간 계약이란 근무 시간을 미리 정하지 않고, 사용자가 필요할 때마다 호출해 일을 시키는 고용 형태를 말합니다. 계약은 존재하지만 보장된 근무 시간은 없습니다.

쟁점의 실체

논쟁의 발단은 같은 신문이 8월 12일 자로 보도한 기사였습니다. 제로 시간 계약을 규제할 경우 영국 기업이 연간 최대 50억 파운드(약 9조 2,500억 원)의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박 사무총장은 이 수치가 매우 넓은 추정 구간의 최상단 값일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같은 추정에서 가장 낮은 금액은 3억 5,000만 파운드(약 6,475억 원)로, 두 수치의 차이는 열네 배에 이릅니다.

더 주목할 대목은 최상단 수치가 성립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그에 따르면 50억 파운드라는 금액에 도달하려면 고용주들이 새 법을 사실상 무시하고 임박한 근무 취소를 계속하며, 그 결과 노동자에게 29억 파운드(약 5조 3,650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상황을 가정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법을 지키기만 해도 추산 비용의 절반 가까이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습니다. 위법을 전제로 산출한 비용을 규제 반대의 근거로 삼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누가 비용을 부담하고 있는가

노박 사무총장은 불안정 노동자 세 명 중 한 명이 근무 취소와 시간 단축 등으로 연평균 5,000파운드(약 925만 원) 이상의 소득 손실을 겪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금액은 통계 수치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거를 유지할 수 있는지, 난방을 켤 수 있는지, 자녀에게 따뜻한 식사를 차릴 수 있는지를 가르는 실질적 경계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기업이 부담할 비용은 최대치로 부각하면서, 불안정 고용을 보전하기 위해 복지제도(Universal Credit)를 통해 납세자가 이미 지출하고 있는 비용은 계산에서 빠져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수십 년 전 최저임금 도입 당시 동원된 논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하여

다만 이 기고문은 노동조합 대표의 의견이며, 반대편의 주장 역시 함께 살펴야 공정합니다. 사용자 단체들은 호출형 근로가 계절적 수요 변동이 큰 소매·요식·물류 업종의 현실적 대응 수단이며, 규제가 지나치면 채용 자체가 줄어 가장 약한 노동자가 먼저 배제된다고 반박해 왔습니다. 실제로 유연 근무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학생이나 은퇴 후 소득 보완을 원하는 계층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유연성 자체가 아니라, 그 유연성의 위험을 누가 떠안느냐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

이 논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노동시장에도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근로가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며, 그 상당 부분을 시니어 세대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공공형 일자리, 시설 관리, 경비, 배송 보조, 플랫폼 호출 노동에 이르기까지 근무 일정이 사후에 통보되거나 갑작스레 취소되는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초단시간 근로는 주휴수당과 퇴직급여 적용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 근로시간이 조금만 조정되어도 소득과 사회보험 자격이 함께 흔들립니다.

시니어 노동자에게 예측 가능성은 젊은 세대보다 더 절실합니다. 병원 진료 일정, 손자녀 돌봄, 연금 수급 시기와의 조율이 모두 근무 일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질서와 안정은 보수적 가치의 핵심입니다. 계약이 지켜지고 약속한 일정이 통보 없이 뒤집히지 않는 것, 이는 규제가 아니라 신뢰의 기본입니다. 기업의 활력을 위축시키는 과잉 입법은 경계해야 하지만,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는 함께 가야 합니다. 유연성을 허용하되 최소한의 사전 통보 기간과 근무 취소 시 보상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 그리고 그 기준을 예외 없이 적용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합리적 균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풀려진 숫자로 벌이는 공방보다, 검증된 자료를 놓고 벌이는 토론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초단시간 근로 실태에 대한 정확한 통계부터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