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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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공급망의 균열을 비추다

마트의 과자 매대는 오랫동안 화려한 원색이 경쟁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 그 위에 덧입혀진 사진 한 장은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소비자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마케팅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적인 풍경을 정면에서 흔드는 결정이 일본에서 나왔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과자 업체 가루비(カルビー)가 주력 제품 14종의 포장지를 흑백 2색 인쇄로 전환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시니어 독자 여러분께도 익숙하실 감자칩 ‘우스시오(순한 소금맛)’와 ‘콘소메 펀치’, ‘노리시오(김소금맛)’를 비롯해 새우칩 ‘갓파에비센’ 등이 그 대상입니다. 오는 5월 25일 출하분부터 순차적으로 적용되며, 7월 출시 예정이던 사워크림 맛 신제품은 출시 자체가 연기되었습니다.호르무즈 해협의 그림자, 과자 봉지까지 미치다

이 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란 사이의 무력 충돌 이후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국제 유가가 급등하였고, 그 여파로 원유에서 정제되는 나프타(naphtha) 공급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나프타는 플라스틱 필름과 비닐, 접착제는 물론 인쇄용 잉크의 핵심 원료입니다. 특히 잉크에 쓰이는 톨루엔과 자일렌 같은 용제, 그리고 다채로운 색을 내는 안료의 상당 부분이 석유계 원료에 의존합니다. 일반 포장 인쇄에는 보통 4색에서 8색의 잉크가 들어가는데, 흑백 2색으로 줄이면 원료 사용량을 절반 수준까지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가루비(カルビー)는 일찍이 지난 3월 말부터 모노크롬 전환을 검토해 왔으며, 이번 조치를 임시 대응이 아니라 선제적 위험 관리로 보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経済新聞)은 전했습니다.

일본 산업계 전반으로 번지는 단색화 흐름

파장은 가루비(カルビー) 한 회사에 그치지 않습니다. 햄·소시지 업체 이토햄요네큐홀딩스(伊藤ハム米久ホールディングス)의 우라타 히로유키 사장은 결산 발표회에서 향후 컬러풀한 포장 유지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닛신제분웰나(日清製粉ウェルナ)는 6월 납품분부터 ‘마마 스파게티’ 등 건면 묶음 테이프의 인쇄를 생략하기로 하였고, 일부 음료 업체는 유산균 음료 용기 인쇄를 없애는 방안을 추진합니다. 일본 경제산업성(経済産業省)도 현재 박스 단위 판매에만 허용된 무라벨 음료를 내년부터 낱개 판매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일본 식품·음료 업계 712개 기업으로 구성된 국민생활산업·소비자단체연합회(国民生活産業·消費者団体連合会) 조사에서는 응답 기업의 70퍼센트 이상이 나프타 수급 불안이 지속될 경우 가격 인상에 나설 수 있다고 답하였으며, 40퍼센트가량은 제품 용량 또는 사양 자체를 재검토하겠다고 응답하였습니다. 한 중견 제과 업체는 포장재 업체로부터 6월 이후 필름 가격을 20~40퍼센트 인상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비린대학(桜美林大学) 미야모토 후미유키 교수는 포장 색상이 소비자의 식욕과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핵심 요소라며 흑백 전환이 브랜드 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였습니다. 반면 마케팅 조사 업체 아스마크(アスマーク)는 가루비(カルビー)처럼 인지도가 높은 제품은 충성 고객층이 형성되어 있어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분석하였습니다.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

이번 사태는 한국 사회에도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닙니다. 일본은 나프타 수요의 60퍼센트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며 그 가운데 70퍼센트가 중동산이라는 점에서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한국 또한 석유화학 원료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구조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다만 정부가 중동 특사단을 통해 카자흐스탄·사우디아라비아·오만·카타르 등과 협력하여 연말까지 원유와 나프타 일부 물량을 추가 확보하였고, 국내 최대 나프타분해시설 운영사인 여천NCC가 공장 가동률을 65퍼센트로 상향 조정하며 공급선을 그리스·알제리·나이지리아·이집트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대목입니다. 한국에서 가루비(カルビー) 제품을 생산하는 해태가루비는 허니버터칩 포장 변경 계획이 없다고 밝혔으나,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안심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화려함 대신 안정, 시니어 세대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

흑백 봉지는 단순한 디자인 변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온 일상의 풍요가 실은 정교하지만 위태로운 글로벌 공급망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지구 반대편의 군사적 충돌이 식탁 위 과자 봉지의 색깔까지 바꿔놓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막연한 불안감이나 과잉 대응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냉정한 상황 인식과 안정적 공급망 확보를 최우선에 두는 합리적 대응입니다. 화려한 색채를 잠시 내려놓는 가루비(カルビー)의 선택은, 화려함보다 안정을 우선시하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풍요의 시대를 지나오며 결핍과 절약의 가치를 몸으로 익히신 시니어 세대의 경험과 지혜가, 흔들리는 공급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전체에 차분한 균형추가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