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오랜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는 인생의 보상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그 귀중한 시간을 조용히 잠식하는 새로운 위협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손안의 스마트폰입니다. 청소년의 과사용은 사회적 화두가 된 지 오래이지만, 정작 가용 시간이 가장 많은 시니어 세대의 디지털 의존 문제는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미국 유수의 매체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한 어느 은퇴 부부의 고백
미국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2026년 5월 12일자 A11면 퍼스널 저널 섹션에 은퇴 부부의 솔직한 고백을 담은 칼럼을 게재하였습니다. 같은 신문에서 오랜 기간 편집자로 근무하다 2022년 말 함께 은퇴한 스티븐 크라이더 요더(68세)와 카렌 크라이더 요더(69세) 부부가 연재하는 ‘은퇴 초보(Retirement Rookies)’ 칼럼이 그것입니다.
남편 스티븐 씨는 고장 난 진공청소기를 직접 손보고자 유튜브에서 부품 교체 영상을 찾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밤 열한 시 가까이 되도록 구조견 영상과 드라마 장면까지 수십 편을 연달아 보고 있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정작 청소기는 처음 모습 그대로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내 카렌 씨 역시 휴대전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자조할 정도로 의존이 깊어졌으며, 아침마다 단어 맞히기 놀이의 결과를 자매들과 주고받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 사회관계망 서비스와 짧은 영상에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의지가 아니라 설계입니다
이 문제의 본질은 개인의 의지력 부족이 아닙니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을 끝없이 권하는 알고리즘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자들이 사용자의 시선이 화면을 떠나지 못하도록 정교하게 설계해 놓은 결과물입니다. 하나의 응용 프로그램을 지워도 다른 응용 프로그램이 유사한 자극을 다시 들이미는 구조이기도 합니다. 미국 공영 라디오 NPR(National Public Radio)에 출연한 한 심리학자는, 성공한 사람들은 유혹과 끊임없이 맞서 싸우기보다 유혹이 등장할 여지 자체가 줄어들도록 자신의 환경을 재설계한다는 취지의 조언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은퇴 세대의 취약성은 더욱 각별합니다. 출퇴근 시각도, 업무 마감도, 잔소리할 상사도 사라진 시간 구조 안에서 행동을 멈춰 세울 외부 장치가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직장이라는 외적 규율이 해제된 자리에 디지털 자극이 그대로 밀려들어 오는 형국입니다.
한국 시니어를 위한 현실적 처방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이 매년 발표하는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에서도 60대 이상 시니어의 과의존 위험군 비율은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자유 시간이 갑자기 늘어나는 은퇴 직후야말로 본인 스스로 가장 경계해야 할 시기입니다.
요더 부부가 찾아낸 해법은 부부가 한 자전거에 앞뒤로 함께 올라 페달을 밟는 장거리 자전거 여행이었습니다. 손에 휴대전화를 들 여지 자체가 사라지는 활동을 일상에 박아 넣은 것입니다. 우리 시니어 세대에도 곧장 응용할 부분이 있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 휴대전화를 침실 밖에 두고 별도의 자명종 시계를 마련하시는 작은 규칙, 식탁과 거실 소파에는 휴대전화를 가져가지 않기로 가족과 약속하시는 습관, 그리고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손과 발이 함께 움직이는 활동을 일과에 끼워 넣으시는 노력입니다. 텃밭 가꾸기, 서예, 손주와의 산책, 동네 도서관 자원봉사 같은 활동은 짧은 영상이 주는 즉각적 자극과는 결이 다른, 보다 깊고 오래 가는 만족감을 안겨 줍니다.
이미 일상 기능에 지장이 느껴지신다면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이 운영하는 스마트쉼센터(☎ 1599-0075)에서 무료 상담을 받으실 수 있으며, 무력감이나 우울감이 동반된다면 정신건강위기상담전화(☎ 1577-0199)와 보건복지상담센터(☎ 129)를 통해 가까운 상담 자원을 안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절제의 미덕은 여전히 유효한 자산입니다
디지털 기기의 편익을 부정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시니어 세대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온 절제와 시간 관리의 미덕은 화려한 알고리즘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자산입니다. 스스로를 탓하며 의지력을 채찍질하기보다, 손에 휴대전화가 닿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두시는 편이 훨씬 빠르고 확실한 길입니다. 자유로워진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은퇴 이후 삶의 품격을 결정합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