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 23일


학교 4년 다니면서 제일 크게 용기를 내 보았다…

이런 보잘 것 없는 자보가 제일 큰 용기라는 게 부끄럽지만.

정의감 사명감 철철 흘러넘치는 사람 말고, 나처럼 찌질하고 헷갈리고 눈치 많이보고 개인적인 그런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부끄럽지만 성원에 힘입어 본문도 올립니다….

—————————————————————-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우울이, 체념이, 냉소가, 무기력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 글을 씁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국어국문학과 10학번 이수현입니다.


처음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물음이 들려왔을 때,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반응했을 때, 저는 조금 경계했습니다. 이렇게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개인의 ‘안녕하지 못함’이 무슨 힘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미 ‘말의 힘’에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저는, 그 물음이 어느 개인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지 않았고, 조직적인 연대로 이어지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물었고, 대답은 여기저기서 들려오지만, 거기서 끝이겠거니 생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개념찬 대학생 인증을 하는 수단으로써, 그게 아니면 수상한 시절에도 내 안녕을 위한 시험공부에 몰두하기 위한 면죄부로써, 혹은 사회적 부채를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갚으려는 속셈으로써, 그것도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녕한’ 이들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꿘부심’의 발로로써, 자보가 그저 신나게 ‘소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시니컬한 태도로 주말을 보내고, 이어지는 자보들의 저의를 분석하다가, 월요일 아침이 되어 기말고사를 치러 학교에 왔습니다. 그리고 펜스에 잔뜩 붙은 자보들을 보았는데, 속수무책으로 울컥하더군요. 정문을 통과할 때만 해도 친구와 “정말 자보가 혁명이 될까”하며 구시렁대고 있었는데 말이죠.


D.H.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저는 곳곳에서 터져 나온 이 안녕치 못하다는 외침들을 통해, 아마 사람들이 비극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비극에 무감각한 것이 하나의 처세술이 되어버린 시대,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정신없는 시대를 우리는 통과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너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감각을, 우리는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혹은 스스로 버렸거나요. 그리고 안암에서 시작된 안부인사가 그 감각을, 조용히 일깨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참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공부와 고민은, 삶을, 세계를 나아지게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월급통장을 나아지게 하는 데만 쓰이고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삶의 주변을 정글이라 칭하고, 그 정글 같은 사나운 세상에 허용된 몇 개의 안전하고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애를 쓰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그 문을 통과하면 된다’는 주문을 걸며, 그 주문을 스스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양보할 수 없는 교리처럼 믿고 사는 건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렇게 삶으로써, 이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세계의 구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데 일조해온 건 아닌지요. 왜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에 대한 고민은 잊혀진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교에 가야하며, 졸업을 하고 안정된 직장에 취직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교육시키고 성공시켜서 행복한 노후를 맞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를 이런 ‘안전한’ 삶의 시나리오만이 단일한 목적이 되어 많은 이들의 삶을 틀 안에 가둬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도대체가 한 단계만 어긋나도 모든 생애기획이 어그러지는, 그런 위태로운 시나리오에 우리 모두는 왜 그렇게 연연하고 있는 걸까요. 아마 불안하기 때문이겠죠. 불확실한 미래가 너무도 불안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오늘’을 저당 잡힌 채로 살아가지 않나요. 미래의 불확실성이 우리에게 오늘, 현재에 불성실할 것을 강요합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우리는, 생존 자체를 목표로 하여 끊임없이 경쟁하고, 스스로를 팔릴 만한 아이템으로 치장하며 세상의 일에는 그저 한숨을 쉬거나 쓴 웃음을 짓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세상이 안녕하건 말건 나의 (미래의) 안녕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리는 배워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혹시 세상이 안녕하지 않은지 말이라도 건넸다가는 나의 안녕이 위협받을지 모르는, 그런 공포 때문에 얌전히 착실하게 살아온 걸지도요.


하지만 제가 대학에 와서 알게된 것은 ‘고진감래’가 순 뻥이라는 거였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가면 애인 생길거야’에서부터 ‘사회에 불만이 있지만 나중에 높은 사람 돼서 바꾸자’까지, 이 도식으로 설명되는 삶의 흔한 레퍼토리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고진감래 정신은 세상에 만연해있는 불평등과 불합리를 끊임없이 은폐하고 지속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동시에, 지금 당장 누려야 하는 온당한 권리를 있지도 않은 미래로 넘기게 만드는 몹쓸 놈이더군요. 누군가가 “못살겠다”고 말하면 어른들은 늘 “더 힘든 사람도 많은데 왜 너만 그러냐”고들 합니다. 무슨 고생올림픽이라도 해서 우승자만 대표로 힘들어야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그냥 ‘닥치고 견디라’는 말이 고진감래로 포장되어 퍼져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백날 ‘고’를 견디며 살았지만 ‘감’ 같은 건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고 비참으로 가득했던 생을 마감하는 이들을 그동안 수차례 봐왔으니까요.

저도 청춘을 팔면 값진 미래를 살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이 망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망할 테니 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앞가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 한사람의 망함을 피하기 위해서 취하는 행동들이, 나를 괴롭게 만드는 이 구조를 재생산하는데 일조한다는 걸 깨닫고 나니 멈칫하게 되었달까요.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결백할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을 안 이상,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개를 파묻고 나의 힐링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함께 힘들어하는 누군가의 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그의 죄를 ‘순전한 무사유’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그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을 뿐인데, 그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말과 사유의 무능력,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극히 평범하고 이성적이며 심

지어 근면하기까지 한 아이히만을 사상 유래 없는 범죄자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기꺼이 관찰하고 대화해야 합니다. 도대체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데 어떻게 위로를 하며 살 수 있을지 난감하고 어렵다는 사실을 한 번 털어놓아봅시다. 말하기는 실천이고, 실천은 효과를 가지므로, 우리는 이 말하기로써 어떤 실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밖으로 나와 세상을 눈으로 관찰하면, 모든 사람들이 서로 끊어진 듯 보이지만 결국엔 같은 세계 안에 같은 끈으로 연결돼있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선동의 알레르기를 가진 이들은, 그간 우리가 왜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경쟁’과 ‘생존’이란 정언명령에 대해서는 선동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갖지 않았는지 성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어지는 이 자보들의 행진이, 맹목적으로 죄의식을 자극하고 ‘깨어 있는 자들’의 연합에 가담하라고 유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무협지적 정서야말로 ‘팩트’에 근거한 타인의 선의와 의지를 도매금으로 망가뜨리고 세계를 혼돈에 빠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얄팍한 도덕적 우월감이 아니잖아요.


모든 종류의 성찰과 고민을 기꺼이 털어놓아봅시다. 인간으로 사는 것, 주체로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며 함부로 재단될 수 없는 것인지를 이야기해봅시다. 나의 안녕과 세계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필요한 방식으로 각자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합시다. 그리고 조금 더 용기를 내어, 크고 긴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합시다.

저는 노동자가 안녕한 사회와 학자가 안녕한 사회는 다르지 않고, 농부가 안녕한 사회와 예술가가 안녕한 사회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닿아있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이 투쟁에 지지와 응원을 보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안녕하지 못하다고 답해온 청소년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제가 이 자보를 쓰기 위해 내는 한 줌의 용기보다 그들은 훨씬 더 큰 용기를 내고 더 큰 두려움을 감수하며 그 글을 써 붙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깨알같은 안녕보다, 지금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고 골몰하겠습니다. 불가능한 가능을 열어젖히기 위하여, 난처하고 모호한 상황 앞에서 나를 예외로 두지 않겠습니다.

저 역시 여전히 확신이 부족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 매일 흔들립니다. 다만 지금까지 알던 삶이 끝장나더라도, 여전히 나는 살아가야 하기에, 어떻게 살 것인지 자꾸 걱정할 뿐입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 글이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이나마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문10 수현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