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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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 평론가 페기 누난(Peggy Noonan)이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2026년 8월 8~9일 주말판 A13면 정기 칼럼 ‘선언(DECLARATIONS)’에 기고한 글의 요지는 간명합니다. 사회주의는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이미 미국 정치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먼 나라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 배경에 놓인 구조적 조건은 우리 사회가 이미 겪고 있는 문제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그래서 남의 일로 미뤄 두기 어렵습니다.

수치가 말하는 흐름

해당 칼럼은 최근 발표된 CNN·SSRS 여론조사를 인용해, 민주당원과 민주당 성향 성인 가운데 34퍼센트가 스스로를 민주사회주의자로 규정했다고 전합니다. 또한 미시간주 연방상원의원 민주당 경선에서 진보 진영과 대학가의 지지를 업은 압둘 엘사예드(Abdul El-Sayed) 후보가 승리한 사례를 들어, 이 흐름이 일시적 반짝임이 아니라고 진단합니다. 다만 이 수치는 원문에 인용된 것으로, 본지가 조사 원자료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음을 밝혀 둡니다.

무엇을 말하는 사회주의인가

논지의 핵심은 용어의 실체입니다. 칼럼은 폭스뉴스 선데이(Fox News Sunday)에서 진행된 미국민주사회주의자(DSA) 전국 공동의장과의 문답을 소개합니다. 상원 폐지, 현행 대통령제와 대법원의 대체, 이민통관집행국(ICE) 폐지, 장기 과제로서의 국경 철폐와 미등록 체류자 사면, 국방예산 삭감, 교도소의 대폭 축소, 대다수 대기업의 공공 소유 전환에 대해 공동의장이 모두 긍정의 뜻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통상 정책 목표를 에둘러 말하는 관행과 달리 매우 직설적이었다는 점을 필자는 주목합니다. 즉 지금 논의되는 것은 복지 확대의 정도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골격을 바꾸겠다는 기획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지금인가

필자는 이 흐름의 뿌리를 여섯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오늘의 스물다섯 살 유권자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부모의 불안과 실직을 목격했고, 이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구제금융이 집행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가 그때 손상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공지능의 부상 앞에서 이 체제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는지, 내 집 마련이 가능한지 의문을 품습니다. 셋째, 냉전은 더 이상 생생한 기억이 아닙니다. 물자 부족과 검열, 비밀경찰의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는 북유럽식 복지 모델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남았습니다. 넷째, 종교가 물러난 자리를 정치가 채우고 있습니다. 다섯째, 의회와 언론, 대학, 교회, 법원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수록 개혁 운동은 급진화합니다. 제도가 수선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소셜미디어는 극단에 보상을 지급합니다. 온건함은 조회수를 얻지 못합니다.

이성의 체제와 감정의 신념

칼럼이 인용한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의 통찰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가슴을 끌어안지 못한다는 취지의 지적입니다. 자본주의는 위대한 신념이 아니라 하나의 경제 운영 방식일 뿐이며, 만들고 거래하고 가족을 부양하려는 인간의 본성 위에 자연스럽게 세워진 질서입니다. 반면 사회주의는 신념이며 감정을 움직입니다. 이성의 산물이라는 자본주의의 장점이, 자극과 감흥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오히려 치명적 약점이 된다는 진단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도 가혹하고 불공정한 결과를 낳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현대 복지국가가 건설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며 끊임없는 개혁을 요구하는 혼합경제이지만, 역사적으로 인류가 도달한 최선의 절충일 수 있습니다. 어떤 체제도 인간의 고통과 불의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합니다.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우리 사회에도 같은 조건이 대부분 갖추어져 있습니다. 청년층의 주거 진입 장벽, 인공지능이 바꾸는 일자리 지형, 제도 신뢰의 하락, 알고리즘이 증폭하는 양극화가 그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만의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분단이라는 현실이며, 동시에 냉전을 몸으로 통과한 세대가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를 청년 세대에 대한 훈계로 바꾸는 순간 논의는 실패합니다. 급진화의 원인은 세대의 성정이 아니라 구조에 있습니다. 청년이 체제를 의심하는 이유가 자산 형성의 사다리가 끊어진 데 있다면, 답은 훈계가 아니라 사다리의 복원입니다.  곧 기회는 넉넉히 열되 책임 또한 분명히 묻는 원칙이 여기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시니어 세대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부족과 통제가 무엇이었는지, 자유로운 시장과 사유재산이 어떻게 한 나라를 일으켰는지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세대입니다. 그 증언은 과거를 자랑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감당할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제도를 지키는 일과 제도를 고치는 일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고치지 않는 제도는 결국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