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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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장인의 자리

산업 구조가 빠르게 변하면서, 한 시대를 떠받쳐 온 직업들이 차례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손끝의 숙련과 평생의 경험이 응축된 일자리일수록 그 속도는 더욱 빠릅니다. 이러한 흐름은 산업의 효율성을 따지는 문제를 넘어, 한 사회가 축적해 온 지식과 감각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남깁니다.

미국 박물관에 마지막으로 남은 전업 박제사

미국 뉴욕타임스는 2026년 5월 21일자 지면을 통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자연사 박물관에 근무하는 72세의 박제사 팀 보바드(Tim Bovard) 씨를 소개하였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보바드 씨는 미국 내 모든 박물관을 통틀어 현재 유일하게 남은 전업 박제사(taxidermist)이며, 1984년부터 같은 박물관에서 한 세기가 넘는 동물 표본 컬렉션을 관리해 오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박물관에 도착해 표본의 보존 상태를 점검하고, 디오라마(diorama, 입체 전시 모형)를 새롭게 손질하며, 새 전시를 기획하는 일이 그의 일과라고 합니다.

열한 살 소년이 걸어온 60여 년의 외길

같은 보도에 따르면 보바드 씨는 11세 무렵 도로에서 발견한 동물 사체를 안내서 한 권에 의지해 직접 박제로 되살리며 이 길에 들어섰습니다. 십 대 시절에는 박제사 밑에서 도제(徒弟) 수련을 시작하였고, 동급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그는 같은 스승 아래에서 전업 견습으로 일하였습니다. 이후 동물학(zoology)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토대까지 함께 다졌습니다. 그가 다루는 일은 단순한 박제 작업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디오라마 안의 나뭇잎과 꽃, 쌓인 눈과 흐르는 물줄기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치며, 식물 잎을 만들 때는 진공 성형(vacuum forming) 기법으로 직접 채집한 식물에서 본을 떠 수십만 장을 제작한다고 전해집니다.

자연을 통째로 이해하는 감각

해당 보도에 따르면 보바드 씨는 살아 있는 듯한 맹금(猛禽)을 표현하기 위해 단순히 눈매를 살리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새가 어떤 종류의 나뭇가지에 어떤 자세로 앉을지, 깃을 어떻게 다듬었을지, 어떤 먹이를 노리고 있을지, 그리고 그 새의 존재가 주변 다른 동물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까지 함께 헤아린다고 합니다. 사자 디오라마를 손질할 때는 암사자 두 마리가 이마를 맞대는 사회적 인사 장면을 연출하였고, 멕시코 소노라 지역의 협곡을 재현할 때는 재규어 무리에서 달아나는 작은 멧돼지를 함께 배치해 장면 전체에 움직임을 부여하였다고 합니다. 작업이 한창일 때면 며칠씩 사무실 바닥에서 잠을 청하며, 접착제가 굳어가는 동안에도 표정과 가죽의 주름을 미세하게 조정한다고 같은 매체는 전합니다.

“은퇴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72세에 이른 그에게 은퇴가 머지않았느냐고 묻자, 보바드 씨는 웃음과 함께 은퇴 계획이 전혀 없다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올해 박제하고 싶은 오랑우탄이 따로 있고, 만들어야 할 잎사귀도 수십만 장이 남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한 분야에서 60여 년을 일관되게 걸어 온 시니어 장인의 답으로는 매우 자연스러운 한마디라 하겠습니다.

한국 사회에 비추어 본 시사점

이 사례는 한국 사회에도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사회는 통상 60세 전후를 정년으로 삼고, 이후의 시기는 흔히 ‘은퇴 이후’라는 한 단어로 묶어 표현해 왔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축적한 숙련과 안목은 정년이라는 행정적 경계선과는 무관하게 계속 깊어집니다. 디오라마 한 장면을 위해 식물의 본을 직접 채집하고, 동물의 사회적 행동까지 꿰뚫어 보는 70대 장인의 모습은, 시니어의 노동이 사회에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물론 모든 시니어가 같은 방식의 일을 이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평생 한 길을 걸어 온 분들의 손끝과 안목을 사회 제도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가치의 보존 여부가 갈린다는 점입니다. 도제식 전수 구조, 박물관과 같은 공공 영역에서의 장기 고용, 그리고 숙련직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함께 갖추어질 때 비로소 한 세대의 경험이 다음 세대로 온전히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지원과 책임의 균형 위에서

시니어 세대의 일은 일방적인 시혜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며, 단순한 복지의 영역으로만 다루어져서도 안 됩니다. 일할 수 있는 자리와 환경을 사회가 마련하는 지원과, 그 자리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본인의 노력이 균형을 이룰 때, 시니어의 노동은 본래의 무게를 회복합니다. 새벽 4시 30분에 박물관 문을 여는 72세 장인의 모습은, 그 균형이 어떤 결실로 이어지는지를 조용히 일러 줍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숙련은 한 사회의 안전과 품격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기반입니다. 시니어 세대의 일과 지혜를 어떻게 제도 안에 자리매김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한 직군의 존속에 관한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가 무엇을 지킬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