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인공지능 시대, 한계가 도리어 인간성을 빛나게 한다
가속하는 인공지능, 흔들리는 인간의 자리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이 일상 깊숙이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는 전에 없던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챗봇이 글을 쓰고, 영상이 자동으로 만들어지며, 머지않아 가정용 돌봄 로봇이 시니어의 하루를 살피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 떠오르는 시점입니다. 특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만큼, 인공지능과 인간성, 돌봄과 존엄의 문제는 시니어 세대에게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황 레오 14세의 첫 회칙 ‘위대한 인류’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5월 25일 교황 레오 14세는 즉위 후 첫 회칙(回勅) ‘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류)’를 공표했습니다. 교황은 인공지능 시대에 인류가 맞이한 선택을 성경 속 두 도시, 곧 ‘바벨’과 ‘예루살렘’의 비유로 제시했다고 합니다. 바벨이 기술적 오만(hubris)이 낳은 혼돈의 상징이라면, 예루살렘은 바빌론 유수(幽囚) 이후 느헤미야의 주도 아래 공동체의 관계를 먼저 회복하고 그다음에 도시를 다시 세운 협력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회칙의 핵심은 단순한 ‘기술 찬반’ 논쟁이 아니라, 어떤 인간상(人間像)을 전제로 어떤 기술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이냐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있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모방할 수 없는 것
위겔의 칼럼이 전하는 회칙의 가장 날카로운 대목은 인공지능과 인간 지능의 본질적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챗GPT(ChatGPT), 제미나이(Gemini), 클로드(Claude)와 같은 시스템은 인간 지능의 특정한 기능을 모방하며, 속도와 연산 능력에서는 인간을 능가합니다. 그러나 그 힘은 데이터 처리에 묶여 있을 뿐, 신체를 통한 경험, 기쁨과 고통의 감각, 관계 속에서의 성숙, 사랑과 책임의 내적 의미, 그리고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양심에는 닿지 못한다는 것이 교황의 진단입니다. 인공지능은 공감과 이해를 흉내 낼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물의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교황은 디지털 네트워크가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은 환영하면서도, 인간을 기술로 초월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과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기획에 대해서는 분명한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고 전해집니다.
한계 속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인간성
회칙에서 시니어 세대에 가장 큰 울림을 주는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한계’로 받아들이는 무능력, 질병, 노령, 고통, 그리고 취약함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성이 발현되는 자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타인의 필요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마음, 어둠 한가운데서도 솟아나는 관대함, 영적 경험과 신앙은 모두 ‘한계’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위겔이 전하는 회칙은 다운증후군을 안고 태어난 아이를 통해 가족이 더 깊어진 경우, 상처 입은 영혼이 다시 일어서도록 돕는 정신과 의사들, 그리고 치매로 약해진 시니어에게 정교하고 극진한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의 자리를 구체적인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리가 실리콘밸리의 어떤 알고리즘도 복제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고결함이 피어나는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와 시니어 세대에 주는 시사점
이 메시지는 한국 사회에 묵직한 울림을 남깁니다. 한국은 이미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선 초고령사회에 들어섰고, 가족 구조의 변화와 1인 시니어 가구의 급증, 치매 인구의 가파른 증가 속에서 ‘돌봄의 위기’는 사회적 화두가 된 지 오래입니다. 정부와 산업계는 인공지능과 돌봄 로봇을 해법의 한 축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교황의 회칙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공지능이 돌봄의 ‘효율’을 높일 수는 있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니어 세대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온 삶의 경험, 가족과 이웃을 향한 책임감, 공동체를 지탱해 온 도덕적 감각은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의 자산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빨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가치, 즉 가정의 질서와 사회의 안전,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예절은 오히려 시니어 세대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 ─ 인공지능 시대에 시니어가 서야 할 자리
교황 레오 14세의 첫 회칙이 던진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존엄은 국가가 부여하는 혜택이나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양도할 수 없는 내재적 가치라는 점입니다. 또한 진정한 진보는 타인에게 열린 마음, 귀 기울이는 지성, 그리고 나누기보다 결합하기를 택하는 의지에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기술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무턱대고 배척하지 않는 균형 잡힌 시선, 합리적 기준 위에서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되 사람 사이의 관계와 책임이라는 오래된 토대를 잃지 않는 자세야말로, 시니어 세대가 인공지능 시대 한국 사회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지원(Fördern)이며 동시에 다음 세대에 요구(Fordern)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바벨의 길로 갈 것인가, 예루살렘의 길로 갈 것인가. 그 선택은 결국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내리는 것이며, 인생의 한계와 깊이를 모두 통과한 시니어 세대야말로 그 선택의 가장 든든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