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식 날의 필통 하나
한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식 날 처음으로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교실 바닥에 펼쳐진 친구들의 연필과 지우개가 유난히 튼튼하고 오래 쓸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독일 일간지 디 벨트(Die Welt)가 2026년 8월 3일자 지면에 소개한 작가 미리암 다부드반디(Miriam Davoudvandi)의 자전적 에세이는 이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당시 그 가정은 아버지의 얼마 되지 않는 병가 수당으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지면은 미국의 유명 방송인이 우유 한 팩 값을 모른다고 말해 여론의 눈총을 받은 일화를 대비시킵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입에 올릴 일이 없는 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형편이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부모의 심정,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자란 아이의 마음자리를 이 책은 정면으로 다룹니다.
독일 사회가 마주한 숫자
기사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빈곤 계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서기까지 평균 여섯 세대, 약 150년이 걸리는 것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습니다. 또한 독일 국민의 16퍼센트, 1,300만 명 이상이 빈곤층으로 분류된다고 전합니다. 학업 성취도는 부모의 학력보다 소득에 더 크게 좌우된다는 대목도 눈에 띕니다.
저자의 가족사는 독일식 빈곤의 전형을 압축합니다. 정치적 이유로 고국을 떠난 아버지, 이주 과정에서 만난 어머니, 그리고 본국에서 간호사로 일했으나 학력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청소 일에 종사하게 된 어머니의 사연입니다. 이주와 불안정 고용, 질병, 한부모 가정이라는 요소가 겹치며 계층 하락이 굳어졌다는 분석입니다. 해당 저서는 BTB 출판사에서 256쪽 분량, 18유로(약 2만 9천 원)에 출간되었습니다.
빈곤이 남기는 마음의 습관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통장 잔고가 아니라 마음의 구조입니다. 기사는 이를 빈곤 마인드셋(Poverty Mindset)이라는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예상치 못한 지출 한 번이 남은 저축을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목덜미에 늘 얹혀 있어, 사실상 평생을 생존 모드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이 마음의 습관이 인간관계까지 규정한다고 고백합니다. 받은 만큼 되돌려주지 못할 것이라는 감각 때문에 오히려 처음부터 과하게 베풀게 된다는 것입니다. 친구의 부모가 풍기던 여유로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태도가 미세한 질투심을 남겼다는 서술도 이어집니다. 정원이 있는 집, 정기 구독하는 잡지 같은 사소한 표지들이 계층의 경계선을 그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상황에 따라 말투와 처신을 바꾸는 이른바 코드 스위칭(Code-switching)을 일찍 익혔고, 성적을 자신이 사는 동네 바깥으로 나가는 입장권으로 여겼다고 회고합니다.
주목할 점은 저자가 자신의 인생을 성공담으로 포장하기를 거부한다는 대목입니다. 가난을 다루는 사회적 시선이 극단적인 빈곤 현장을 구경거리로 소비하거나, 반대로 소수의 신분 상승 사례만 부각하는 두 갈래로 흐른다고 비판합니다. 이 비판은 자신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상황에도 그대로 겨눠집니다.
우리 사회가 새겨야 할 대목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사정만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시니어 빈곤 문제는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거듭 지적되어 왔습니다. 평생을 아껴 자녀를 가르치고 집 한 채를 마련한 세대가, 정작 자신의 노후에는 병원비와 관리비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금액만이 아닙니다. 자녀에게 부담이 될까 아픈 것을 숨기고, 모임 자리를 슬그머니 피하고, 필요한 치료를 미루는 마음의 습관이야말로 우리 세대가 겪는 빈곤 마인드셋의 얼굴입니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합니다. 소득이 학업 성취를 좌우한다는 지적은 우리에게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교육 격차가 사실상 세대 간 계층 이동의 문턱을 결정하는 구조에서, 손자녀 교육비를 대신 감당하는 시니어 가정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대를 건너 빈곤이 이어지는 통로를 끊는 일은 개인의 근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원과 요구, 그 균형에 대하여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사회에 돌리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절약과 성실, 자립의 가치는 우리 세대가 몸으로 증명해 온 미덕이며 앞으로도 흔들려서는 안 될 기준입니다. 다만 개인의 노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냉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시혜적 온정도, 무조건적 자기 책임론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안전망은 국가가 흔들림 없이 지켜 주되, 근로 의욕과 자립 노력에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도록 설계하는 일, 즉 지원과 요구의 균형입니다. 기초연금과 노인일자리 사업의 확충 못지않게, 그 재원이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쓰이는지 투명하게 검증하는 절차가 함께 가야 합니다.
연필 한 자루의 차이를 기억하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억을 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것은 결국 사람의 품위입니다. 형편이 안 된다는 말을 꺼내야 하는 부모의 수치심과, 아플 때 자식 눈치부터 살피는 시니어의 망설임을 줄여 가는 일, 그것이 오래 살아 본 세대가 다음 세대에 요구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요구일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