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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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가 키우는 ‘리머런스’, 시니어가 먼저 짚어야 할 문제

70여 년의 간극을 뛰어넘은 두 개의 기록

불가리아 소피아의 한 벼룩시장에서 스물여덟 살의 미술가가 1947년에 쓰인 편지 묶음을 발견했습니다. 편지를 쓴 여성은 한 남성을 향한 마음을 거의 광기에 가까운 언어로 적어 내려갔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견디기 힘들고, 오직 그 사람과 자신만 남았으면 좋겠다는 심경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애정은 철저히 한쪽 방향이었습니다. 상대가 답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 편지마다 되풀이됩니다.

편지를 수집한 미술가는 자신의 5년 치 일기를 나란히 펼쳐 보고서야 한 가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 자신 역시 똑같은 형태의 관계를 반복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상대에 대한 끝없는 갈증,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하는 데서 오는 피로, 모든 것이 거짓 같다가 다시 진실 같아지는 감정의 진폭이 그것입니다.

리머런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박

이 상태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1970년대 심리학자 도로시 테노브가 제시한 리머런스(Limerence)라는 개념입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빈번한 생각, 상대의 사소한 반응에 따라 극단적으로 흔들리는 기분, 생생한 환상이 그 특징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시몬 드 보부아르의 글에도 유사한 정서가 등장할 만큼 오래된 인간의 현상이지만, 이 용어가 폭발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소셜 미디어 시대에 들어서입니다.

구글 트렌드 기준으로 최근 5년간 이 단어의 검색량은 500퍼센트 늘었습니다. 틱톡에는 관련 해시태그가 붙은 영상이 4만 3천 건 이상, 인스타그램에는 4만 6천 건 이상의 게시물이 올라와 있습니다. 관련 포럼과 자조 모임까지 생겨났습니다. 영국 치체스터 대학교의 심리학자는 이 현상이 어느 순간 곳곳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고 진단합니다.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어느 뇌과학자의 설문에서는 절반 이상이 이러한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구조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나약함을 탓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현상을 키우는 환경이 따로 있다는 점입니다.

첫째는 정보의 과잉입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관심 대상의 친구, 친척, 어제의 동선까지 손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정보는 환상을 키우는 연료가 됩니다. 둘째는 역설적이게도 불확실성입니다. 상대가 누른 ‘좋아요’ 하나, 스토리를 본 기록 하나가 관심인지 무관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해석에 몇 시간씩을 소모합니다. 정보와 불확실성이 동시에 뇌의 보상 체계를 자극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여기에 상업적 설계가 얹힙니다. 메타는 지난 6월 월 3.99달러(약 5,500원, 2026년 8월 초 원·달러 환율 약 1,390원 기준)의 유료 서비스를 내놓았습니다. 특정 인물이 자신의 게시물을 몇 번 보았는지 시각 기록과 함께 확인하고, 시청자 목록에서 특정 계정을 검색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이 회사에서 3년간 일했던 한 전직 엔지니어는 이를 두고, 상대를 들여다보는 도구와 자신을 감추는 도구를 같은 시장에 함께 팔고 있다는 취지로 비판했습니다. 누가 나를 얼마나 주의 깊게 보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욕구 자체가 상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해당 기업은 취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뇌 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밝혀져 있습니다. 흥분을 일으키는 노르에피네프린, 접촉을 부추기는 도파민, 접촉이 보상으로 이어질 때 분비되는 옥시토신이 차례로 작동합니다. 감정이 깊어질수록 보상을 찾는 신호는 강해지고, 욕구를 조절하는 뇌의 집행 기능은 도리어 약해집니다. 앞서 언급한 뇌과학자는 이때 분비되는 엔도르핀을 자연이 만든 마약에 비유했습니다. 중독과 같은 원리로, 같은 쾌감을 얻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반응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

이 문제를 청년 세대의 유별난 연애 풍속으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합니다.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 강박이 대개 친밀감에 대한 갈망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외로움이 커지는 사회에서 이런 집착이 함께 늘어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1인 가구가 빠르게 늘고, 대면 관계의 밀도가 얇아지고 있습니다. 시니어 세대도 예외가 아닙니다. 스마트폰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화면 너머 누군가의 반응 하나에 마음이 오르내리는 경험은 연령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녀와 손주의 안부를 확인하려 계정을 들여다보다가 답이 없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쳐 본 분이라면, 이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절제라는 오래된 해법

전문가들의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고, 또 그만큼 단호합니다. 자극의 공급을 끊는 것입니다. 접촉을 최대한 제한해 어떠한 보상도 강화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금단과 유사한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그들은 경고합니다. 앞서의 미술가도 연락을 끊고 계정에서 상대를 지웠지만, 생각을 멈추기까지는 여러 달이 걸렸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기술은 앞으로도 더 정교하게 우리의 관심을 사고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방향을 정하는 힘, 곧 절제입니다. 감정을 억누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이 향하는 곳과 실제로 책임질 관계가 어디인지를 구분하는 능력, 확인되지 않은 신호에 스스로를 저당 잡히지 않는 분별을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시니어 세대가 오랜 세월 몸으로 익혀 온 자산입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밥을 나누며 쌓은 관계, 답이 오지 않는 시간을 견디며 배운 기다림, 감정과 의무를 구분해 온 훈련이 그것입니다. 화면이 만들어 내는 관계의 환영 앞에서, 실체 있는 관계가 무엇인지 먼저 보여 줄 수 있는 세대가 바로 우리입니다. 지원할 것은 지원하되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태도, 그 균형이 지금 세대 간에 가장 필요한 대화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