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호황 뒤편의 세대 격차, 그리고 청년 창업이라는 새로운 활로
멀리서 바라보면 대한민국은 인공지능(AI) 시대의 뚜렷한 승자처럼 보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발하면서 국내 대표 기업들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나란히 시가총액 1조 달러(약 1,500조 원) 고지를 넘어섰습니다. 삼성전자가 2026년 5월 6일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SK하이닉스가 같은 달 27일 두 번째로 이 문턱을 통과했습니다. 호황의 온기는 임직원에게도 전해져, 삼성전자 노사는 지난 5월 성과급 제도 개선안에 합의했고 흑자를 낸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 직원들은 평균 약 5억 6천만 원, 많게는 6억 원에 이르는 성과급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5개국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인공지능 확산에 대해 우려보다 기대가 앞서는 몇 안 되는 나라로 꼽힌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성적표에 가려진 두 개의 노동시장
그러나 밝은 이야기의 이면에는 훨씬 복잡한 현실이 자리합니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오래전부터 깊은 균열을 품어 왔습니다. 대기업과 생산성 높은 일터에서 강력한 고용 안정을 누리는 내부자(insider)와, 중소기업의 울타리 안에서 불안정한 일자리에 놓인 외부자(outsider) 사이의 간극이 그것입니다.
인공지능이 가져다준 혜택은 이 오래된 격차를 좁히기보다 오히려 더 뚜렷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규모 성과급도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리는 수많은 협력업체 노동자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몫입니다. 이 성과급이 세후 전액 자사주 형태로 지급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 온기는 내부자의 울타리 안에 더욱 촘촘히 머무는 셈입니다.
균열은 세대 사이에서도 선명합니다. 한국은행 조사국이 2025년 10월 내놓은 이슈노트에 따르면, 2022년 7월부터 2025년 7월까지 3년 동안 15세에서 29세 청년층의 일자리는 약 21만 1천 개가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50대 시니어의 일자리는 약 20만 9천 개가 늘었습니다.
주목할 대목은 사라진 청년 일자리의 대부분이 인공지능 노출도가 높은 업종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약 20만 8천 개가 인공지능 고노출 업종에서 발생했으며,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시스템 통합·관리 분야에서 11.2퍼센트, 출판 분야에서 20.4퍼센트, 전문 서비스 분야에서 8.5퍼센트, 정보 서비스 분야에서 23.8퍼센트가 줄었습니다. 반면 보건과 교육, 항공 운송처럼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대체하기보다 보조하는 데 쓰이는 분야에서는 감소 폭이 훨씬 완만했습니다.
한국은행 연구진은 이를 연공편향 기술변화(seniority-biased technological change)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인공지능은 정형화된 교과서적 지식에 주로 의존하는 청년 주니어의 업무는 비교적 손쉽게 대체하는 반면, 오랜 경력에서 우러난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과 사람을 상대하는 능력을 갖춘 시니어의 업무는 오히려 보조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린다는 분석입니다. 이런 조짐은 영국 등에서도 소프트웨어 개발 직무를 중심으로 나타나지만, 세대 간 골이 한국만큼 깊은 곳은 드뭅니다.
왜 고통은 청년에게만 쏠리는가
그렇다면 기술 전환의 부담은 어째서 유독 청년에게 집중되는 것일까요. 한국노동연구원의 장지연 선임연구위원은 그 배경으로 내부자와 외부자 구조를 지목합니다. 이미 대기업에 자리 잡은 노동자는 강력한 고용 보호를 받기에, 기업은 인공지능에 맞춰 조직을 조정할 때 기존 직원을 내보내는 대신 신규 채용의 문을 좁히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전환의 충격이 노동시장에 새로 들어서려는 청년 세대에게 불균형하게 전가됩니다. 사실 우리 청년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가 등장한 2022년 말 이전부터 극심한 취업난을 겪어 왔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2년 보고서에서, 일자리 창출의 엔진이던 대기업들이 자본·기술 집약적 구조로 바뀌고 외주화에 기대면서 청년 채용의 통로가 좁아졌다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좁은 문을 넘지 못한 청년들은 생산성 낮은 중소기업으로 향하기보다 대기업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취업 준비 기간을 늘렸고, 그사이 중소기업은 인재 부족과 경쟁력 저하의 악순환에 갇혔습니다.
반도체가 남긴 재원, 어디에 쓸 것인가
다행히 정부 안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됩니다. 반도체 호황으로 세수가 크게 늘면서 재정에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는 2026년 7월 5일 고위당정협의회를 열고 이 추가 세수를 재원으로 하는 미래대응기금 신설을 공식화했습니다. 이 기금은 차세대 반도체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육성 같은 대형 사업과 함께, 20대와 30대 청년의 주거와 창업, 일자리를 지원하는 데 쓰일 예정입니다.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기존 대기업에 대한 고용 보조를 넘어, 노동시장의 바깥에 놓인 청년 1인 사업자와 프리랜서, 창업가에게 안정적 기반과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 재교육 기회, 그리고 과감한 초기 자본을 함께 지원하자는 것입니다.
여건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기술 역량을 갖춘 청년들이 대기업의 문을 두드리는 대신 인공지능을 도구 삼아 세계 시장을 겨냥한 창업에 나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입니다. 닫힌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다면 차라리 밖에서 새로운 기술로 승부를 보라는 제언인 셈입니다.
청년과 시니어를 위한 조언
이 변화는 청년에게 불안한 소식이지만, 뒤집어 보면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닙니다. 대기업 공채라는 단 하나의 사다리에 매달리기보다, 인공지능을 도구 삼아 스스로 일을 만들어 내는 길이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공지능이 쉽게 대신하기 어려운 능력, 곧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사람을 이해하는 감각, 상황을 판단하는 힘을 함께 키워 나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시니어 독자에게도 이 소식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의 흐름에서 시니어의 경험은 인공지능과 결합해 오히려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저절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하며, 이는 자녀와 손주 세대가 마주한 벽을 이해하고 함께 넘어서려는 마음과도 이어집니다. 오랜 경험과 여유를 갖춘 시니어라면 청년의 도전에 조언과 응원을 보태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세대가 서로 등을 돌리는 대신 손을 맞잡을 때, 인공지능이 만든 격차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파이낸셜 타임스 미국판 2026년 7월 7일 자에 실린 고용 담당 칼럼니스트 세라 오코너(Sarah O’Connor)의 오피니언 칼럼을 참고해 재구성했습니다. 통계와 사실관계는 한국은행 이슈노트 제2025-30호(한진수, 오삼일), 퓨리서치센터 조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와 국내 언론 보도를 함께 확인해 반영했습니다. 본문의 환율은 2026년 7월 8일 기준 미국 달러당 약 1,513원(인베스팅닷컴 종가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