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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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 사이 두 번의 조문, 그리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비춘 노년의 식탁

지난주는 유난히 무거운 한 주였습니다. 월요일에는 한 친구의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고향의 병원 장례식장을 찾았고, 사흘 뒤 금요일에는 또 다른 친구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같은 병원 같은 자리에서 다시 검은 옷을 입었습니다. 부모님을 하나둘 떠나보내는 나이, 이제 우리 세대가 집안에서 가장 웃어른의 자리로 올라서고 있음을 새삼 실감한 한 주였습니다.

빈소에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주로 모였습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댄 반가움도 잠시, 대화는 이내 익숙한 자리로 흘러갔습니다. 40여 년 전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가 끝없이 되풀이되었던 것입니다. 누가 어느 중학교 출신이고, 그 학교의 1등은 누구였고, 누가 사관학교를 갔고, 그때 누가는 문과였고 누가 이과였고, 그때 누가 어느 학교 누구를 남몰래 좋아했는지 하는 이야기들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 주인공이였던 몇 몇 친구들의 이름만 반복해서 언급될 뿐, 조연이었던 친구들은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란 고작 3년, 그것도 아직 여물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어떤 친구는 일찍 철이 들었고 어떤 친구는 한참 미숙했던, 저마다 설익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이를 악물고 살아낸 그 40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40년의 세월은 조연이었던 그 누구도 모두 주인공이 되어 오늘 현재까지 살아왔습니다. 그 모두가 사회에 나가 무엇을 이루고 무엇에 실패했는지, 어떤 고비를 어떻게 넘겼는지, 그 긴 이야기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식탁 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문득 며칠 전 읽은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의 한 칼럼이 떠올랐습니다. 피츠버그에서 카펫을 파는 노년의 필자 루 와이스(Lou Weiss)가 쓴 글로, 초등학교 동창들이 하나둘 일흔을 맞이하는 저녁 모임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린 에세이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미국 시니어 세대의 식탁도 겉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디저트가 얼마나 화려한지보다 식당이 얼마나 조용한지를 먼저 따지고, 이른 저녁 시간에 예약을 잡으며, 주요리 하나를 여럿이 나눠 먹고 남은 음식은 이튿날 점심으로 싸 가는 소박한 자리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식탁에 오르는 대화의 결은 사뭇 달랐습니다. 새로 태어난 손주 자랑, 요즘 누가 또 넘어졌는가 하는 걱정, 욕실에 안전 손잡이를 다는 요령,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되도록 집을 줄여 옮기는 다운사이징까지, 대화는 철저히 지금 이 순간과 앞으로의 삶에 닿아 있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음악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푸념마저도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은 있었습니다. 필자는 친구들을 지금의 늙은 얼굴이 아니라 가장 눈부셨던 젊은 날의 모습으로 기억한다고 적었습니다. 다만 그 그리움은 현재의 안부와 내일의 채비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을 뿐, 대화의 전부를 지난 시절이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와의 미묘한 차이를 보았습니다. 미국 친구들의 식탁이 손주와 건강과 이사 계획으로, 다시 말해 여전히 흘러가고 있는 삶으로 채워졌다면, 우리의 식탁은 이미 40년 전에 끝난 3년의 시간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한쪽은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을 이야기했고, 다른 한쪽은 미처 여물지도 못했던 짧은 과거를 되감고 또 되감았던 셈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 저는 이것을 문화의 우열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몇 가지 짐작은 해봅니다. 우리 세대는 치열한 입시와 고단한 성장기를 함께 통과한 까닭에 그 시절의 유대가 유독 질기고 진합니다. 게다가 사회에 나선 뒤 저마다의 길이 크게 갈렸기에, 모두가 마지막으로 동등했던 지점이 바로 그 교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른이 되어 걸어온 길을 꺼내는 순간 은연중에 성취를 견주게 되고, 그 비교가 부담스러운 우리는 누구도 특별히 하지 않았던 그 시절로 슬며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무거운 상갓집의 공기 앞에서 마음이 가장 편안했던 시절을 더듬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움은 남습니다. 우리가 애써 살아낸 40년은 결코 가벼운 세월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한 가정을 일으키고, 자식을 키워내고, 무너질 뻔한 고비를 이 악물고 견뎌낸 저마다의 값진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시니어의 가장 큰 자산은 다름 아닌 그 세월이 쌓아 올린 경험과 지혜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귀한 자산을 우리 스스로 식탁 위에서 지워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앞으로 6~7년이면 저와 제 친구들도 일흔을 맞이합니다. 그때 우리의 식탁에는 어떤 이야기가 오를까요. 여전히 40년 전 교실에 머물러 있을까요, 아니면 살아온 삶을 담담히 나누고 남은 날들을 어떻게 채울지 함께 이야기하게 될까요. 저는 후자이기를 바랍니다. 지나간 3년이 아니라 살아온 40년을, 그리고 앞으로의 10년과 20년을 이야기하는 자리이기를 말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필자는 글 말미에서, 120세까지 장수하라는 거창한 축복 대신 우선 여든까지만 정정하게 살아내고 그다음 일은 그때 가서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습니다. 그저 오래 사는 것을 넘어, 살아온 삶을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노년이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이제 집안의 가장 웃어른이 된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은, 무용담이 되어버린 옛 교실이 아니라 성실하게 살아낸 그 이후의 세월 무게일 것입니다.

당신의 친구들이 모두 일흔이 될 때, 그 식탁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궁금합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