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이긴 자를 떨구고, 남을 이기게 한 자를 뽑다
소년이 만든 것은 무공이 아니었다.
종이 한 장에 세로로 선을 그어 칸을 나누고, 맨 위에 항목을 적었다.
무엇을 했는가 / 몇 번 했는가 / 실패는 몇 번인가 / 무엇을 바꾸었는가 / 바꾼 뒤 몇 번 만에 되었는가
그것뿐이었다. 빈칸만 채우면 되도록 만든 종이였다.
전날 밤 소년은 자기가 왜 세 줄밖에 쓰지 못했는지를 오래 생각했다.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무엇을 적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백지를 앞에 두면 사람은 무엇이든 적을 수 있고, 무엇이든 적을 수 있으면 아무것도 적지 못한다.
주판을 찬 소녀는 백지에도 여든두 줄을 적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애의 재주였다. 재주 없는 자에게는 칸이 필요했다.
소년은 그 종이를 열아홉 장 베껴 썼다.
아침 안개가 걷힐 무렵, 소년은 그것을 들고 자리들을 돌았다.
“이대로 채우시면 됩니다.”
대부분은 받지 않았다.
“네 것이나 잘 채워라.”
“뽑는 수가 백이다. 나 좋으라고 이걸 준다고?”
한 사내는 종이를 받아 그 자리에서 찢었다.
“수작 부리지 마라. 이런 걸 만들어 돌리면 무슨 이득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안 넘어간다.”
소년은 찢긴 종이를 주워 접었다. 그리고 다음 자리로 갔다.
받아 든 자는 처음에 넷이었다. 손이 아주 굳어 글을 잘 못 쓰는 사내가 하나, 첫날 아무것도 못 적어 밤새 울던 아이가 하나. 그들은 칸을 보자 얼굴이 달라졌다.
“이건… 채우면 되는 거로군.”
정오 무렵에는 열넷이 되었다. 채운 자들이 서로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주판을 찬 소녀는 말없이 한 장을 받아 갔다. 그 애는 이미 자기 방식으로 잘 적고 있었으므로 필요가 없었을 텐데도 받았다. 받아서 제 기록 옆에 나란히 놓고 견주어 보았다.
그리고 저녁에 소년을 찾아와 한 줄을 짚었다.
“이 칸이 하나 빠졌다.”
“어느 것 말입니까.”
“‘바꾸지 않았는데 결과가 달라진 경우.'”
소녀가 말했다.
“바람이 바뀌었을 뿐인데 불이 붙는 날이 있다. 그걸 내가 잘해서 그런 줄로 착각하면, 다음에 똑같이 하고도 실패한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칸을 하나 더 그렸다.

사흘째 저녁, 기록이 걷혔다.
시험장에는 이천 명이 다시 모여 앉았다. 목판이 걸릴 자리를 모두가 보고 있었다.
오계대사가 돌 위에 올라섰다. 손에 종이 두 뭉치를 들고 있었다.
“첫 번째 뭉치는 사람마다 적어 낸 줄 수다.”
노인이 그것을 옆에 내려놓았다.
“보지 않겠다.”
웅성거림이 일었다.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았고 그것으로 뽑지 않겠다는 뜻이다.”
노인이 두 번째 뭉치를 들었다.
“이것은 자리별로 묶은 것이다. 너희를 서른 자리로 나누어 앉혔던 것을 잊었느냐. 나는 자리마다 기록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보았다. 첫날과 사흗날 사이에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노인이 종이를 넘겼다.
“어떤 자리는 첫날 잘 쓴 자가 사흗날에도 혼자 잘 썼다. 그 자리의 나머지는 사흘 내내 제자리였다. 어떤 자리는 첫날 모두가 형편없었는데 사흗날에는 모두가 쓸 만해졌다.”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뒤쪽을 뽑겠다.”
터가 술렁였다. 누군가 일어섰다.
“그러면 혼자 잘한 자는 어찌 됩니까. 그자가 제일 뛰어난 것 아닙니까.”
“뛰어나다.”
노인이 순순히 인정했다.
“혼자 일등을 한 자는 제 재주를 증명했다. 그것은 훌륭한 일이다. 다만 그런 자는 죽으면 그 재주도 함께 죽는다.”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우리 관은 그런 사람을 삼백 년간 충분히 겪었다.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이 세운 문파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뛰어남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이 두 번째 뭉치를 들어 보였다.
“그러나 남을 이기게 한 자는 다르다. 그자가 죽어도 그자가 만든 방법은 남는다. 남은 방법이 또 다른 사람을 이기게 한다. 그렇게 정신도 지혜도 함께 맑아지는 것을 신어지(神於智)라 한다.”
노인이 말을 맺었다.
“나는 신어지를 뽑겠다.”
호명이 시작되었다.
주판을 찬 소녀의 이름이 불렸다. 얼굴을 가린 자도 불렸다. 붓 세 자루를 쥔 소녀도 불렸다. 소년이 만든 칸을 받아 갔던 열넷 가운데 아홉이 불렸다.
“시구화.”
소년이 일어섰다.
호명되지 못한 자들 사이로 걸어 나가는 동안, 종이를 찢었던 사내의 눈과 마주쳤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 인이 단 아래에 섰다.
관인(館印)이 하나씩 가슴 옷깃에 찍혔다. 붉은 인주가 마르며 한 글자가 드러났다.
승(承).
“오늘부터 너희는 예비단(豫備團)이다.”
노인이 말했다.
“가슴의 글자를 보아라. 승(承), 잇는다는 뜻이다. 다만 이 글자 앞에는 원래 한 글자가 더 있었다. 그것은 지금 알려주지 않는다.”
노인이 이념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산 위에 있다. 오르면 읽힌다.”
그날 밤 소년은 등불 아래 아비의 뭉치를 폈다.
마지막 장, 절반이 비어 있는 조직도였다. 아비가 다 그리지 못하고 간 자리였다.
소년은 붓을 들었다. 오래 망설이다가, 빈 네모 하나에 글자를 적어 넣었다.
한 글자였다.
칸.
무공의 이름도, 사람의 이름도 아니었다. 다만 소년이 사흘 동안 알아낸 전부였다. 무엇을 적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칸. 재주 없는 자도 채울 수 있는 칸. 그 칸을 만든 사람이 죽어도 남는 칸.
소년은 등불을 껐다.
산문 아래는 어두웠다.
돌기둥 그림자에 검은 옷의 사내가 서 있었다. 손에 든 것은 그날 낮에 관 밖으로 나간 명단 필사본이었다.
사내는 백 개의 이름을 위에서부터 훑어 내려갔다. 손가락이 한 곳에서 멎었다.
시구화.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서주 그 아이입니까. 은자를 마다했다던.”
“그렇다.”
“저 아이도 결국은 상단처럼 되겠지요.”
사내가 웃었다. 서주분궤 마당에서 웃던 것과 같은 웃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없으면 안 되는 자가 되고 싶어 한다. 저 아이도 언젠가는 그리 될 것이다.”
그는 명단을 접어 품에 넣었다.
“그것이 우리 교(敎)의 밑천이다.”
〈다음 회 예고〉 제1부 數 — 밤새 칼을 휘둘렀으나 벤 것이 없다. 예비단 첫 수련장에서 소년이 만나는 자, 정신론(鄭信論).
이 회의 강호경영어
- 신어지(神於智, synergy) 정신과 지혜가 함께 맑아짐. 혼자 이긴 자가 아니라 남을 이기게 한 자에게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