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으면 안 된다는 말은, 없어지면 끝난다는 말
서찰은 짧았다.
천년상단이 진 빚을 전부 떠안겠다는 것이었다. 강남 비단상 열한 곳도, 북방의 모피상도, 관아에 낼 세금까지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갚아주겠노라 했다.
조건은 단 하나였다.
— 상단의 운영 일체를 우리에게 맡기라.
시일목은 그 한 줄을 스무 번쯤 읽었다.
말은 곱게 적혀 있었다. 맡기라 하였지 빼앗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강호에서는 이런 것을 아외소성(我外所成)이라 불렀다. 내[我] 밖[外]에서 이루어지게[所成] 한다는 뜻이다. 힘든 일을 남에게 넘겨 편해지는 방법이었고, 실제로 그리하여 살아난 상회도 적지 않았다.
다만 넘겨준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과가 갈렸다. 짐을 넘긴 자는 살았고, 손발을 넘긴 자도 더러 살았다. 그러나 머리를 넘긴 자가 살아 돌아온 예를 시일목은 알지 못했다.
그는 등잔 아래에서 봉인의 문양을 다시 보았다. 사람 인(人) 자가 둥글게 말려 제 꼬리를 물고 있었다.
속인교(屬人敎).
이튿날 새벽, 부자는 본궤로 가는 길에 올랐다.
산길은 사흘거리였다. 첫날 밤 마른 개울가에서 불을 피우고, 시일목은 아들에게 처음으로 삼십 년의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스물둘에 본궤에 들었을 때, 기만 어른은 서른일곱이셨다.”
불빛에 아비의 얼굴이 붉게 일렁였다.
“그때 어른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다. 밤을 새워 장부를 맞추고, 아랫사람이 실수하면 대신 뒤집어쓰셨다. 나는 그분처럼 되고 싶었다. 상단 사람 모두가 그랬다.”
“그런데요.”
“유능함이 오래되면 병이 된다.”
시일목은 마른 가지를 하나 꺾어 불에 넣었다.
“사람들이 자꾸 어른께만 물으니, 어른은 자꾸 혼자 아시게 되었다. 혼자 아시니 더 빨라지셨고, 빨라지시니 가르칠 틈이 없어지셨다. 그러다 어느 해부터인가 가르치지 않는 것이 습관이 아니라 뜻이 되었다.”
“뜻이라니요.”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다. 그것을 원만(怨慢)이라 한다. 남의 원망[怨]과 제 오만[慢]이 한 몸이 된 자리다. 그 자리에 오래 앉으면 사람은 제가 상단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 실은 상단을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인데도.”
소년은 불을 보며 물었다.
“어른께서 나쁜 분이셨습니까.”
시일목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다.”
그것이 답이었다.
“그분은 이 상단에서 가장 성실한 분이셨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본궤 대청은 사람으로 가득했으나 아무 말도 정해지지 않고 있었다.
장로 하나가 창고를 부수자 했다. 다른 장로가 그러면 상단의 신용이 끝난다 했다. 셋째가 서찰을 받아들이자 했고, 넷째가 그것은 상단을 파는 짓이라 했다. 목소리만 높아지고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시일목이 대청 가운데로 나섰다. 지방 분궤의 대리가 본궤 대청에서 입을 여는 것은 법도에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대청이 조용해졌다.
“우리 상단이 무너진 것이 어른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까.”
누군가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냐고 되받았다.
“아닙니다.”
시일목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어른은 언젠가 돌아가실 분이었습니다.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무너진 것은 어른 한 분이 누우시면 함께 눕도록 상단을 만들어 둔 그 구조입니다. 그것을 강호에서는 이수극(易受剋)이라 합니다. 쉽게[易] 극(剋)을 받는[受]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는 대청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우리는 삼십 년 동안 그 자리를 든든함이라 불렀습니다. 기만(奇萬)이라 적고, 기만(欺瞞)이라 읽었어야 했습니다.”
대청이 뒤집힌 것은 그 다음이었다.
죽은 이를 모욕했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은혜를 모른다는 말이 뒤따랐다. 분궤 대리 주제에 본궤의 법도를 논한다는 말도 나왔다. 시일목은 변명하지 않았다.
단주 천무결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다섯 장의 방책을 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여섯 장이 되었을 뿐이었다.
시일목은 그날로 서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소년이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을 아시면서 왜 오셨느냐고.
“적어두려고 왔다.”
아비가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그 말을 했다는 것을, 누군가는 적어둘 것이다. 오늘은 아무도 듣지 않았지만, 십 년 뒤에 그 종이를 펴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열흘 뒤였다.
천년상단의 인장(印章)이 넘어갔다. 삼백 년 동안 스물아홉 곳의 분궤와 천이백 상회에 찍혀온 그 인장이었다.
인장을 받아 든 쪽에서 보내온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다.
— 오늘부터 여러분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단 사람들은 그 문장을 읽고 안도하였다.
시일목만이 그 종이를 접어 궤에 넣으며 혼잣말을 하였다.
“걱정을 가져간 자가, 결국 상단도 가져간다.”
〈다음 회 예고〉 아비의 장부를 태우고, 태우지 않은 한 장을 품다 — 불길 속에서 소년이 건져낸 것은 비급이 아니었다.
이 회의 강호경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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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외소성(我外所成, outsourcing) 내 밖에서 이루어지게 함. 짐을 넘기는 것과 머리를 넘기는 것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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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怨慢, one-man) 남의 원망과 제 오만이 한 몸이 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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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극(易受剋, risk) 쉽게 극을 받는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