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간(角干)
신라 경위(京位)의 17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
신라 17관등 중의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이름으로, 일명 “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湌)”․“각찬(角湌)”․“서발한(舒發翰)”․“서불한(舒弗邯)”, “주다(酒多)”라고도
전문정보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 10년조에는 일벌찬(一伐湌)으로,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는 일벌간(一伐干)으로, 『양서(梁書)』 권54 열전 신라전에는 자분한지(子賁旱支)로, 『수서(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이벌간(伊罰干)으로,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에는 서발한(舒發韓)으로 표기되었다.
신라 17관등 중의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이름으로, 일명 “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湌)”․“각찬(角湌)”․“서발한(舒發翰)”․“서불한(舒弗邯)”, 또는 “주다(酒多)”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 이사금 9년조에서 이미 제정되었다고 기록하였으나, 실제는 법흥왕 7년(520)의 율령(律令) 공포 때에 제정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진골(眞骨)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관등으로, 공복(公服)의 빛깔은 자색이었다.
각간(角干)이란 관등이 생겨나게 된 배경에 대해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 즉위년조에서는 “왕이 허루에게 말하였다. 이곳 땅 이름이 대포인데, 공은 이곳에서 잘 차린 음식과 맛좋은 술을 마련하여 잔치를 열어 즐겁게 해주었으니 마땅히 주다(酒多)의 위계를 주어 이찬보다 위에 있게 하겠다. 그리고는 마제의 딸을 태자의 짝으로 삼았다. 주다는 후에 각간(角干)이라 일컬어졌다(王謂許婁曰 此地名大庖 公於此 置盛饌美醞 以宴衎之 宜位酒多 在伊湌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 後云角干)”고 기록하였다. 곧, 허루(許婁) 이찬(伊湌)과 마제(摩帝) 이찬(伊湌)이 각자 자기 딸을 태자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딸이 태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 허루(許婁)가 섭섭해하자, 왕이 허루에게 주다(酒多)의 관등을 주면서 이찬(伊湌)보다 상위(上位)에 있도록 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주다(酒多)가 후에 각간(角干)이 되었다고 하였다.
“주다”는 “술한”․“수불한”이라고 훈독(訓讀)되는데, 이는 곧 “서발한”․“서불한”과 같은 말로, 발음상으로 외위(外位)의 “술간(述干)”과 관련이 있다고도 한다.(이우태, 1981)
각간(角干)은 국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종래 사로국(斯盧國) 수장(首長)으로서의 간(干)이 왕의 위치로 격상(格上)되자, 간(干)의 휘하에 두었던 일벌(一伐)․일척(一尺)․피일(彼日)․아척(阿尺) 중 일벌(一伐)에 “간(干)”을 첨가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간(干)”은 수장을 의미하는 말로, 찬(湌)=찬(粲)=한(翰)=한(邯)은 “간(干)”과 같은 뜻의 다른 표기라고 한다.(서의식, 1994) 각간의 위상에 대해 『수서(隋書)』 권81 열전 신라전에는 “그 관(官)은 17등급이 있는데, 그 첫째가 이벌간이며 귀한 것이 상국(相國)과 같다(其官有十七等 其一曰伊罰干 貴如相國)”이라 하여 중국의 “상국(相國)”에 비기고 있다.
신라 중대에 와서 각간 위에 대각간(大角干)․태대각간(太大角干)의 관등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 이미 “대일벌간(大一伐干)”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른 시기에 비정규적으로 특설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법흥왕 7년(520) 율령공포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무열왕 7년(660) 김유신을 대각간으로 임명했고, 문무왕 8년(668) 삼국통일의 공을 세워 다시 태대각간으로 임명했다. 이는 김유신의 공로를 표창한 것으로, 이전의 17관등제의 직급 위에 직위를 더 줌으로써 특별한 대우를 나타낸 것이다.
참고문헌
曾野壽彦, 1955, 「新羅の十七等の官位成立の年代についての一考察」『古代硏究』2, 東京大學敎養學部 人文科學紀要 5.
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이우태, 1981, 「新羅의 村과 村主」『韓國史論』7, 서울대 국사학과.
서의식, 1994, 『新羅上代 ‘干’層의 形成․分化와 重位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논문.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六 乞解尼叱今[昔氏 父于老音角干 卽奈解王第二子也 庚午立 治(四)十六年 是王代 百濟兵始來侵 己丑始築碧骨堤 周□萬七千二十六步 □□百六十六步 水<田>一萬四千七十□]
제16대 걸해니질금[석씨이다. 아버지는 우로음 각간으로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다. 경오에 즉위하여 46년간 다스렸다. 이 왕대에 백제 군사가 처음으로 와서 침범하였다. 기축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쌓았다. 주위가 □만 7천 26보이고, □□백 66보이며, 논이 1만 4천 7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