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9일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으로 시중(侍中) 겸 병부령(兵部令)를 지냈다. 아버지는 각간(角干)을 지낸 김유정(金惟靖)이다. 태종무열왕의 셋째 아들인 문왕(文王)의 5세손이라고 한다. 785년(선덕여왕 6)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경주의 알천 북쪽에 살던 곳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알천을 건널 수가 없어 입궐을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이에 원성왕이 즉위하니 그가 내물왕의 12대손 김경신이다. 그 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중 직에서 퇴임한 것은 혜공왕이 살해되고 선덕왕이 즉위한 780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뒤에도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세력이 막강했던 것 같다.

785년 선덕왕이 죽자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는데, 그가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군신들이 의논해 선덕왕의 족자(族子)인 김주원을 추대하려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귀족들이 그를 왕위에 추대한 배경은 선덕왕의 친족 관계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세력 관계였던 것 같다. 그는 당대의 실력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경쟁자인 김경신(金敬信)은 780년 선덕왕의 즉위와 더불어 세력을 잡아 상대등에 오른 인물이지만, 실제 세력 면에서는 시중 직에서 물러난 김주원에게 오히려 뒤지고 있었다.


≪삼국유사≫ 원성대왕조에 “이찬 김주원이 상재(上宰)이고, 각간 김경신은 이재(二宰)로 있었다.”라고 한 것도 당시 김주원이 세력 서열에서 제일인자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는 귀족회의에서 당연히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로 추대될 수 있었으나,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즉, 김경신은 왕위 계승의 원칙이 흔들리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상 수단을 써서 왕궁을 점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김주원을 지지하던 귀족들도 등을 돌리고 말았다.

≪삼국유사≫에는 “왕(김경신)이 먼저 왕궁에 들어가 즉위하니, 상재를 지지하던 무리들이 모두 왕에게 붙어 새로이 등극한 임금에게 배하(拜賀)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경신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고한 꿈과 북천신(北川神)의 비호에 대한 설화가 전하는데, 당시 김주원의 집이 북천(北川 : 지금의 경주 명활산과 소금강산 사이에서 경주 북부를 관통해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냇물로 추정됨.)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으나, 김경신의 즉위가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원성왕계 왕실이 변칙적인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꾸며 낸 내용이다.

김주원은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한 뒤 원성왕 일파에게 위협을 느꼈던지 중앙에서 계속 거주하지 못하고 명주(溟州 : 지금의 江陵) 지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 지방에는 원래 김주원의 장원(莊園)이 있었고, 또 그와 연결된 친족 세력이 있던 곳이었다.

김주원은 이를 기반으로 지방 귀족화해 중앙과 대립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칭해졌으며,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주원 [金周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85년(선덕왕 6)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경주의 알천 북쪽에 살던 곳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알천을 건널 수가 없어 입궐을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이에 원성왕이 즉위하니 그가 내물왕의 12대손 김경신이다. 그 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주원이 강릉 외가에 머물 적에 한 처자와 인연을 맺었다. 김주원이 도성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이 처자가 잉어에게 하소연하며 편지를 주었고, 잉어는 그 편지를 도성의 김주원에게 전해주었다. 그리하여 김주원이 강릉으로 돌아가 부부의 연을 맺고 강릉에 머물게 되었는데, 명주군왕 김주원이 곧 강릉 김씨의 시조이다. (한국구비문학대계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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